국립현대미술관서 ‘소멸의 시학展’
작가 15인 ‘불후의 명작’ 관념 탈피
불변에 대한 집착은 곧 실존적 욕망
소멸을 향해가는 인간 군상과 닮아
거대한 순환 속 저마다 생 이어가며
형태 너머에 있는 존재의 실상 직면
돌이켜보면 우리는 언제나 지속되는 것들을 신뢰해 왔다. 변하지 않는 것, 오래 남는 것,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들. 시간과 물, 세월처럼 삶 또한 흐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흐름 속에서 끝내 ‘남는 것’들을 기대한다. 흐른다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붙잡으려는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1월30일∼5월3일)는 이러한 믿음과 환상에 정면으로 맞선다. 현대미술이 작품의 보존과 영속성을 전제로 작동해 왔다면, 이번 전시는 ‘불후의 명작’이라는 신화가 기대어온 물리적 고착을 비껴간다. 15인(팀)의 국내외 작가들은 삭고 분해되고 사라지는, ‘불후하지 못한’ 미술을 전면에 내세운다.
◆문명의 모서리에서
근대는 견고한 구조와 변하지 않는 형식에 대한 믿음을 가장 단단히 구축해 낸 시대다. 이성과 과학은 세계의 불확실성을 질서 안에 묶어두는 도구가 되었고, 박물관의 유리창 안에 시간을 보존하는 것이 문명의 성취로 여겨졌다. 불변(不變)에 대한 집착은 유한함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실존적 욕망이 투사된 결과였다.
이은재의 ‘근대의 모서리를 닦아라’는 견고한 인류 역사의 장벽에 균열을 내기를 시도한다. 작가는 아버지가 전한 ‘근대의 모서리를 닦아라’라는 문장을 써 내려가며 외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에그 템페라 기법을 사용했다. 영원한 보존을 지향하는 미술이라는 제도 안에서 삭아갈 재료를 택한 작가의 선택은 시스템의 근간을 흔드는 조용한 반향처럼 느껴진다. 온전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한 작가의 행위와 ‘근대’라는 거대한 이름 사이의 간극은, 어린아이의 글씨처럼 천진하고 정직한 붓질 속에서 일종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아버지가 남긴 다의적인 문장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정비하라는 의미를 넘어, 단단하다고 믿어온 근대적 가치들의 날 선 모서리를 문질러 그 완고함을 무디게 하라는 수행적 권유로도 읽힌다. 이는 거대한 성취를 붕괴하려는 무모한 도전이라기보다 그 견고함이 실은 허상이었음을 폭로하며, 전시의 주제의식을 집약적으로 구현한다.
이은경은 에그 템페라를 쌓고 갈아내며 오랜 침식의 시간을 견뎌온 지층과 같은 표면을 연출한다. 원석과 흙의 미립자들을 개어 올린 캔버스는 억겁의 지질학적 시간을 품고있는 듯하다. 신작 ‘소멸의 빛’에서는 빛에 노출되면 4주 만에 휘발되는 안료를 사용하여 광물의 단단함 이면에 도사린 소멸의 필연성을 대치시킨다. 김주리의 흙 구조물 역시 단단히 구축된 형상을 취하고 있지만,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균열되고 무너진다.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것들조차, 이미 그 안에는 붕괴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형태 아닌 것들: 흩어짐으로써 증명되는
전시장에는 형태를 벗어난 존재들로 가득하다. 아사드 라자의 ‘흡수’는 도시의 폐기물을 섞어 만든 ‘네오소일(neosoil)’을 전시장 바닥에 가득 채우고, 이를 원하는 관객에게 나눠주는 수행적 설치 작품이다. 흙은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미생물의 생동하는 움직임이 가득하다. 이는 존재의 기반이 고정된 형태나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규정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여다함의 작업은 실로 만든 ‘향로’와 연기, 그리고 뜨개질을 하며 기록한 일지로 구성된다. 질서와 무질서를 오가며 직조된 듯 부드럽고 유기적인 모양의 향로는 가볍게 피어나는 향의 모습을 닮아 있다. 뜨개 일지에서는 작가의 시선이 더 내밀하게 드러난다. 그는 실이 풀리는 모습에서 산사태나 빙하의 붕괴를 읽어내며, 작은 행위와 숨결에도 세계의 질서가 깃들어있음을 환기한다. 유코 모리는 과일이 부패하며 발생하는 미세한 전류를 빛과 소리의 파동으로 치환하여, 단 한 번뿐인 생의 순간을 소리로 감각하게 한다. 설령 전극이 떨어져 소리가 멈추더라도, 그 분해와 변화의 에너지는 끊이지 않는 파동이 되어 세계의 순환 속으로 스며든다. 인간의 오감으로 포착할 수 없을 뿐, 형체 없는 것들이야말로 존재의 방식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는지 모른다.
◆걷어낸 자리에서
전시는 나아가 이름이 지닌 고정성을 걷어내고 그것이 내포해 온 가치들을 해체한다. 세실리아 비쿠냐의 ‘프레카리오스’는 해변에서 주운 잔해나 조개껍데기, 실, 깃털, 헝겊 등 파도에 씻겨 내려온 이름 모를 존재들을 엮어 만든 조각 연작이다. 미소(微小)하고 연약하여 숨죽이고 바라보게 만드는 이 무명의 조각들은, 세상이 부여한 모든 타이틀을 걷어낸 자리에 남는 존재의 민낯과 불완전함 속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에드가 칼렐은 돌 위에 과일과 야채를 올려두어 제의적 풍경을 연출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일이 썩고 마르는 과정 자체가 곧 작품이 된다. 전시장 곳곳에 고립된 섬처럼 흩어져 있지만 결국 같은 운명을 공유하는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소멸을 향해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과 닮아있다. 델시 모렐로스는 낮게 내려앉은 천장과 서서히 좁아지는 흙의 통로로 관객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의 공간으로 이끈다. 거대한 흙벽을 쌓아 만든 통로는 죽음을 끝이 아닌, 근원으로의 회귀, 즉 가장 편안한 암흑의 상태로 제시한다. 어둠이 짙게 깔린 흙의 숨결 속에서 집요하게 붙들어 온 사회적 지위나 이름표는 힘을 잃는다. 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수식어가 걷힌 자리에서 드러나는 무심하고도 선명한 존재의 실감이다.
◆영원 너머의 영원
근대의 신화를 거스르는 이 전시는 결국 모든 것은 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소멸’은 종말이나 비극이 아니다. 흙과 연기, 부패하는 과일처럼 모든 크고 작은 생명은 끝을 향해 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형태와 과정을 달리할 뿐 세계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멈춤 없이 저마다의 생을 이어 나가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끊임없이 변모하는 영원한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우리는 비로소 형태 너머에서 지속되는 존재의 실상을 마주하게 된다. 전시는 물리적으로 끝을 맺어도 그것이 건넨 작고 묵직한 속삭임은 우리 곁에서 계속해서 조용히 삭아갈 것이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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