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앞서간 이상 문학
외국 문단도 관심 보여
반인륜주의·성적 일탈?
과장된 이미지 벗어나
친우 구본웅 시선으로
금홍과의 사랑 진정성
결핍과 고뇌의 삶 그려
소설 심사 많이 했지만
직접 써볼 엄두 못 내와
이상이란 특출난 인물 덕
솜씨 발휘할 기회 얻은 듯
중국의 여러 대학을 돌며 수차례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면 젊은 학자들이 찾아와 천재 작가 이상(1910~1937)에 대해 묻곤 했다. 이상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거 참, 중국에서도 이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구나.
미국이나 이탈리아 등지에서 이상을 연구하는 이들로부터도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이상문학을 묻거나, 그가 엮은 이상에 관한 책에 대해 물었다. A4 용지 한 장을 넘길 정도로 이상에 대한 물음만은 성의껏 답했다. 이상문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구나.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2023년부터 중국 산둥대학 초청으로 외국인 석좌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의 동아시아문화연구센터를 설립하기 위한 차원이었지만, 팬데믹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한·중 관계도 교착돼 있어 일은 진척되지 못했다. 대신 일주일에 한 차례 대학원생 세미나를 주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소일했다.
이상을 제대로 알리고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처음 생각한 것은 쉽게 쓴 이상의 평전. 글을 써나갔지만, 어느 새 자신이 이미 냈던 책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건 안돼, 다른 스타일로 접근을 해보자.
숙소의 벽에다 단어 세 개를 적어 넣었다. ‘결여, 결핍, 금제.’ 이상이 생전 앓고 있던 세 가지 문제였다. 그는 사랑이 결여돼 있었고, 경제적으로 결핍돼 있었으며, 시대 제도적으로 억압돼 있었다. 세 단어를 적어 놓고 이상의 스물여섯 해 인생을 쓰기 시작했다.
강단에서 오랫동안 한국문학을 가르쳤던 권영민 교수가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에서 탈출을 꿈꾼 이상의 스물여섯 해 삶과 문학을 그린 장편소설 ‘주피터 초상’(폭스코너)을 발표했다. ‘이상 전집’을 간행하고, 단행본 ‘오감도의 탄생’, ‘이상 연구’ 등을 펴낸 이상 전문가이지만, 소설 발표는 이번이 처음이다.
소설은 이상 연구자인 ‘나’가 연구실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황학동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노인이 찾아와 원고 뭉치를 건네며 시작된다. 원고를 읽어보니 ‘청색지사’라는 글자가 찍혀 있고, 맨 끝에는 ‘서산’이라는 호가 적혀 있다. 이상과 오랫동안 교유해온 화가 구본웅의 호로, 원고는 구본웅의 글이었다.
이야기는 이후 이처럼 구본웅의 시점으로 이상의 삶이 펼쳐진다. 화가를 꿈꾸었던 이상의 젊은 시절부터, 폐결핵으로 인한 좌절과 기생 금홍과의 연애, ‘오감도’ 게재를 비롯한 집필 활동, 최저 낙원으로 삼은 제비다방의 운영, 구인회 동인으로 매진했던 출판, 그리고 변동림과의 결혼과 일본 유학, 그리고 이상의 죽음까지….
“주피터! 너의 이름 뒤로 시와 소설을 사랑하는 미래의 독자가 줄을 서 있는 게 보이는가? 너는 언제나 맨 앞에서 낯선 새 시대에 맞서 새로운 독자와 만나고 그들과 함께 다시 앞으로 나가겠지. 그리고 ‘주피터’라는 또 하나의 이름 그대로 우리 문학사의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이 되리니, 어둠 속 서러움을 묻고 명목하라.”
평생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권영민은 어쩌자고 이상의 인생을 그린 소설을 써야 했을까. 그가 그린 인간 이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노교수의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권 교수를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구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로 만났다.
―논문과 학술서만 써왔는데 왜 갑자기 소설을 시도한 것인지.
“늘 갈증이 있었지만, 강단에 선 이래 소설을 쓸 생각을 못했다. 소설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심사를 많이 했는데, 작품을 읽다 보니 더 이상 흉내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이기 때문에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인간 이상의 진짜 모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상이라는 특출한 인물이 있어 낡은 솜씨를 한번 발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권형, 이 대목은 잘못 됐어. 이상이 하늘나라에서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왜 구본웅의 시선으로 이상을 그리게 된 것인가.
“이상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연보를 책 뒤에 소개했는데, 중간에 빈칸이 많았다. 그 빈칸을 채우지 않고선 이상의 성장 과정이나 예술적 관심을 제대로 알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증언해 줄 가상적 인물을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소학교 시절부터 이상이 죽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던 구본웅의 시각으로 정리하게 됐다. 가장 오랜 시간 그의 옆에 있었고, 인간 이상의 고뇌와 선택의 과정의 옆에는 늘 구본웅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사실과 허구가 어느 정도로 배합돼 있는지.
“팩트가 없거나 사실이 부족한 부분은 허구로 채우되 결여, 결핍, 금제 세 키워드를 염두에 두면서 빈칸을 채워 나갔다. 시기별로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사실이지만, 그 사이사이 비어 있는 내용은 허구로 채웠다. 억지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이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갈 때까지를 허구로 채웠다.”
―소설에선 이상과 금홍과의 관계에 상당히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상에 대한 책 가운데 그를 지나치게 반인륜주의자나 성적인 일탈 등으로 과장해 설명하는 부문이 많다. 대체로 금홍이라는 여성 때문에 그랬겠지만, 이상은 금홍을 진정으로 사랑하려 했고 금홍 역시 그것을 진실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상이 개인적 경험을 쓴 글을 보면, 가장 많은 부문이 병에 대한 것이고 그다음이 금홍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봉별기’와 ‘집’이라는 시 등에 금홍과 이별을 괴로워하는 이야기도 담겨 있다. 금홍을 함께 만났던 구본웅은 이상 사후 한 번도 이상과 금홍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를 풀어내고자 했다.”
―혹시 이상의 삶이나 문학 가운데 오해하거나 잘못 해석된 부문이 있는지.
“연구자들이 이상문학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且8氏의出發(차팔씨의 출발)’이라는 일본어 시다. ‘차(且)’ 밑에 ‘팔(八)’자를 한자로 고쳐 붙이면 ‘구(具)’자가 되는데, 이는 장애를 이겨내고 화가로 성공해 돌아오는 친구 구본웅의 출발을 격려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들이 앞의 차자를 남자의 성기로 잘못 읽고 섹스하는 장면이라고 잘못 해석, 이상을 잡스럽게 이해하게 만들었다.”
1948년 보령에서 나고 자란 권영민은 1971년 평론 ‘오노마토포이아의 문학적 한계성’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1981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며 ‘한국 현대문학사’, ‘한국문학 50년’, ‘이상 전집’, ‘이상 연구’ 등을 펴냈다. 현재 중국 산둥대학 초청 교수로 있지만, 조만간 해외 생활을 정리할 계획이다.
권영민은 밤 12시에서 12시 반 사이에 잠자리에 든다. 자는 시간이 짧아 새벽 5시쯤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세미나 주재는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대학 연구실에는 거의 매일 나간다. 연구실에선 강의 준비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서예 선생과 미술 선생으로부터 각각 서예와 그림도 배운다.
노교수 권영민은 학교에 나가면 늘 캠퍼스를 걷는다. 뒷문으로 들어가 속보로 캠퍼스를 한 바퀴. 산책 도중 꽃이나 나무를 만나면 사진도 한 컷. 그리하여 어느 6월에는 검붉은 열매를 품은 오얏나무도 만날 것이다. 오얏나무에 아로새겨진 이상과, 구본웅의 빛나는 우정도….
“‘고마워, 형아.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이네.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몰라. 약속할게. 고공에 가서도 계속 그림을 그릴게. 이걸 오얏나무로 만들었다고? 오얏나무 상자.’ 그는 ‘오얏 리, 상자 상’이라고 하면서 땅바닥에 이상(李箱)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내가 준 화구상자를 자기 이름으로 삼아야겠다고 말했다. ‘이상, 어때?’ 그가 천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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