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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뒤 가려진 차별… 美의 폭력적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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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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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둘러싼 권력 어떻게 작동했는지 조명
‘백인성’이란 특권층 위한 정치적 발명품
노예제는 美 자본주의 핵심 동력으로 강조
서부 개척사 이면에 숨겨진 폭력의 기록…
법과 제도가 설계한 구조적 불평등 분석

인종으로 읽는 미국의 역사/ 한국미국사학회/ 궁리/ 3만8000원

 

‘기회의 땅’ ‘이민자의 나라’ 우리는 미국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누군가에게 희망의 땅인 미국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배제와 차별, 침묵을 강요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책을 펴낸 한국미국사학회 필진은 “작금의 트럼프 2기 미국의 상황은 인종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민 규제 강화, 낙태·성소수자 권리 후퇴, 국경 통제 담론이 다시 전면에 부상하며, 누가 ‘진짜 미국인’인가를 둘러싼 인종 정치가 부활하고 있다”고 말한다. 학회는 식민지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미국을 만들어온 인종이라는 거울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1989년 설립한 한국미국사학회는 미국사 연구 지형을 확장해온 대표적인 학술단체다. 그간 미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 연구에 관해 연구성과를 축적해왔다.

한국미국사학회가 엮은 ‘인종으로 읽는 미국의 역사’는 미국사를 위대한 민주주의의 발전사로 서술하는 대신, ‘인종’이라는 렌즈를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됐는가를 추적한다.
한국미국사학회가 엮은 ‘인종으로 읽는 미국의 역사’는 미국사를 위대한 민주주의의 발전사로 서술하는 대신, ‘인종’이라는 렌즈를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됐는가를 추적한다.

권은혜, 김영섭, 김연진, 김인선, 김정욱 등 필진은 노예제, 이민법, 투표권, 도시 폭력과 같은 역사적 장면에서 인종을 둘러싼 권력이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되짚어본다. 미국사를 인종화의 과정, 국가가 사람들을 분류, 배제, 위계화해온 과정으로 읽어내며 오늘의 상황을 재조명하고 있다.

책은 세 개의 주제로 엮었다. 식민지 시기부터 19세기까지를 다루는 첫 번째 주제는 ‘인종 질서의 형성과 백인의 차별적 시선’, 20세기 전반기를 검토하는 두 번째 주제는 ‘인종 경계, 인종 통과, 그리고 저항’이다. 20세기 후반기에 해당하는 세 번째 주제는 ‘인종 정체성과 정치’이다. 이러한 주제를 통해 인종이라는 프리즘으로 미국사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1917년 뉴욕침묵 시위. 미국 흑인인권 운동사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뉴욕 맨해튼 5번가에서 약 1만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무 구호도 외치지 않은 채 벌인 시위다. 궁리 제공
1917년 뉴욕침묵 시위. 미국 흑인인권 운동사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뉴욕 맨해튼 5번가에서 약 1만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무 구호도 외치지 않은 채 벌인 시위다. 궁리 제공
1919년 시카고 인종폭동 때의 한 장면. 미국 현대사에서 인종 갈등이 산업도시의 구조적 문제와 맞물려 폭발한 대표적 사건이다. 궁리 제공
1919년 시카고 인종폭동 때의 한 장면. 미국 현대사에서 인종 갈등이 산업도시의 구조적 문제와 맞물려 폭발한 대표적 사건이다. 궁리 제공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 장면.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으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을 이끌었다. 궁리 제공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 장면.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으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을 이끌었다. 궁리 제공

저자들은 미국의 인종주의는 건국기부터 시작돼 법과 제도를 통해 미국 전역에서 점진적으로 강화됐을 뿐 아니라, 스포츠와 영화 같은 문화적 매체 속에서 지속해서 재현됐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인종은 자연적 차이가 아니라 정치·경제·법적 필요 속에서 구성된 개념이며, 미국사는 곧 이 인종 질서가 형성되고 재편되는 역사로 보고 있다.

“인종은 과학적 타당성을 결여한 사회적 구성물이며 허구적 성격의 발명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 일부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종을 인구(population)라는 개념으로 대체해야만 할까? 혹은 인류학자들처럼 인종 대신 에스니시티(ethnicity) 개념을 사용해야만 할까? 상상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인종은 아무런 사회적 실재를 갖지 못하는 것일까? (중략) 인종은, 비록 그것이 상상을 본질로 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고 하더라도, 물질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권력과 재원을 불평등하게 분배하는,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에 기반을 둔 인종적 특권과 인종 질서를 재생산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인종 개념이 ‘신뢰를 상실’한 듯 보이는 오늘날에도 인종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53쪽>

한국미국사학회/ 궁리/ 3만8000원
한국미국사학회/ 궁리/ 3만8000원

저자들은 ‘백인성(whiteness)’의 형성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백인이라는 범주는 미국 건국 초기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18~19세기 미국에서 백인은 노예제와 계급 갈등을 관리하기 위한 정치적 발명품에 가까웠다. 유럽 출신 이민자들 사이의 계층 갈등을 완화하고, 흑인 노예와 가난한 백인의 연대를 차단하기 위해 ‘백인’이라는 특권적 정체성이 법과 관습을 통해 구축됐다.

노예제는 미국의 ‘흑역사’나 일탈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예제는 미국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이었다고 강조한다. 면화 산업, 금융, 보험, 무역 네트워크는 흑인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미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은 이 착취 구조 위에서 가능했다. 노예제는 단순한 노동 착취가 아니라 인종을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분류한 제도적 폭력이었다. 흑인은 법적으로 재산이었고, 가족은 언제든 해체될 수 있었으며, 교육과 시민권은 철저히 차단됐다.

미국 서부 개척사는 오래도록 진취성과 도전의 상징으로 서술돼 왔으나 이 책에서는 이러한 신화를 해체한다. 서부 확장은 원주민의 강제 이주, 조약 파기, 문화 말살을 동반한 폭력의 역사였으며, 인종주의는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저자들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백인 우월성과 영토 확장을 결합한 정치적 논리였다고 설명한다. ‘명백한 운명’은 19세기 미국에서 널리 퍼졌던 영토 팽창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미국은 신의 뜻에 따라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확장해야 할 운명을 지녔다는 믿음이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은 문명화의 대상이거나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규정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구조적 불평등의 뿌리가 됐다.

민권운동 이후 법적 차별은 상당 부분 철폐되었지만, 책은 ‘색맹주의’(인종·성별·계급 같은 차이를 보지 말고 모두를 동일하게 대하자는 관점)가 오히려 구조적 불평등을 가리는 역할을 해왔다고 비판한다. 형식적 평등 아래에서도 교육, 주거, 의료, 사법 체계 전반에 걸친 격차는 여전히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인종 차별이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중국인 배척법, 이민 쿼터 제도, 시민권 취득 요건 등은 인종적 위계를 제도화한 대표적 사례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영원한 외국인’으로 규정된 역사적 맥락은 오늘날 혐오와 배제의 뿌리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더불어 미국사의 어두운 페이지를 장식했던 인종주의가 ‘탈인종’을 기대하는 지금까지도 폭력적인 그림자로 어른거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도 각별하다. 한·미 관계, 이민 문제, 다문화 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미국의 인종사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다문화 정책을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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