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따라 하는 추격형 성장 모델 한계
대부분 분야서 中에 주도권 경쟁 뒤처져
똑같은 일 반복하는 건 축적 아니라 퇴적
시행착오를 경험 쌓는 ‘축적의 시간’으로
모든 혁신은 수없이 도전한 뒤에 빛 발해
‘K팝’ 민간 자생적 경험 축적해 스케일업
곧 닥쳐올 AI발 실업 인구 문제보다 심각
인간 능력 증강 방식 직업 재조정 힘써야
최근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실에서 만난 이정동(59)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의 강점인 추격형 성장 모델이 수명을 다한 전환 국면에 들어섰다고 진단하며 새로운 성장 경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명저 ‘축적의 시간’으로 국내 기술 혁신 생태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과학기술 혁신 연구자다. 세상에 없던 개념을 만들어내는 ‘최초의 혁신적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의 ‘그랜드 퀘스트’ 프로젝트도 이끌고 있다. 그는 한국은 지금까지 ‘정답이 있는 게임’에서 실수?오차를 줄이는 근면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류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꿀 새 기술이 등장한 대격변기에는 그러한 모방 모델로는 주도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도전해야 합니다. 도전을 해야 성공을 향한 축적의 경험, ‘스케일업’의 노하우가 쌓여요. 우리나라처럼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선례가 있나’, ‘검증된 방식인가’를 따져 묻고, 실패 시 불이익을 주는 사회문화에선 기술 혁신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서적이 빼곡한 이 교수의 방에는 암호처럼 생긴 그림 종이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제자들과 함께 만든 ‘휴대폰 진화계통로’, ‘자동차 진화계통로’ 등 각 제품의 기술이 어디서 왔는지 선대(先代)를 추적한 결과물이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일종의 ‘제품별 족보’를 완성하는 작업 중 하나다. 자료포락분석(Data Envelopment Analysis, DEA)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이 교수는 10여년 전부터 기술의 과거를 추적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진화 연구에 매진해왔다. 시대 흐름을 읽고 새 분야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21세기 ‘게임 체인저’가 된 AI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우리 사회에 어떤 파급력을 미칠진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누군가가 개발한 AI 기술이 새 시대를 제패할 세계 표준, 범용 기술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미국이 빅테크(거대 기술기업)들을 중심으로, 중국이 국가 주도로 자원을 총동원해 AI 기술 고도화에 전력하는 것도 가장 먼저 세계 표준이 될 ‘개념 설계’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라고 했다.
“이제는 (선진국이 제시한) 답을 찾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문제를 내는 나라가 돼야 성장할 수 있어요. 그게 어려운 원인은 다양하지만 핑계댈 일이 아니라 일단 작은 도전부터 시작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아울러) 앞으로 AI발 실업은 인구 문제보다 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텐데 그 영향을 진단할 방법조차 없어 큰 걱정이에요.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합니다.”
다음은 이 교수와의 일문일답.
ㅡ한국 경제는 어떤 국면에 접어들었나.
“우리는 이미 제시된 선진국의 ‘표준’(이 교수는 ‘개념 설계’로 정의)을 쫓으며 그 표준(설계도)보다 더 제품을 잘 만드는 데 승부를 걸었다. 벤치마킹할 대상과 정답지가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추격했다. 이는 한국이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경로였고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중국으로 인해 한계가 왔다. 선진국의 개념 설계를 갖고 누가 더 잘 만드는지를 겨루면 중국이 우리를 앞선다. 한국이 기존에 해왔던 성장 모델로는 절대 승리할 수가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는 ‘더 잘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해야 하는데 그런 시도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
ㅡ이유가 무엇일까.
“비유적으로 말해보면 어렸을 때 뛰어난 테니스 선수가 성인이 돼서 성공하는 건 더 힘들다는 말이 있다. 유년 시절엔 실수를 하지 않거나 적게 하는 아이가 잘하고 승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서도 실수하지 않는 데 집중하다 보면, 이래저래 다르게 치면서 공격적인 플레이를 잘하는 선수에게 밀리게 된다. 정답이 있을 때는 실수하지 않는 게 효과적이지만, 새롭게 발자국을 내야 하는 프런티어 단계에서는 도전을 가로막는 제약이 된다.”
ㅡ축적의 경험이 필요한 건가.
“제가 말하는 축적은 새로운 일을 하면서 시행착오 등 다른 경험을 하는 걸 말한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효율성을 높이는 건 축적이 아니라 퇴적이다. 달인의 레벨에선 중국을 이길 수가 없다. 당장 각 분야에서 엄청나게 도전적인 투자를 하라는 건 아니다. 테슬라나 엔비디아 같은 기업들을 보면 정작 실험적인 투자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다. 재무적으로는 작지만 끊임없이 도전적인 과제를 제시하면서 사람들에게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ㅡ산업 현장에서 도전을 어렵게 하는 걸림돌은 무엇인가.
“여러 요인 중 하나가 금융이다. 금융계가 리스크를 지지 않고 예대 마진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려는 한 산업계가 뛰기 어렵다. 미국에선 구글벤처스 같은 기업주도벤처캐피털(CVC)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우리는 CVC도 약하다.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인수하면 기술을 탈취한다고 보는 인식이 있다. 과거에는 시장을 빼앗기 위해 벤처를 인수하기도 했지만, 답이 없는 상황에선 벤처의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를 대기업이 사들인 뒤 스케일업하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실리콘밸리 안에서 스케일업이 이뤄지는 미국에선 구글 같은 기업이 자꾸 벤처를 사들인다. 한국은 이런 움직임이 부족하다 보니 우리 벤처들이 구글에 인수?합병되길 꿈꾸는 안타까운 상황이 만들어진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 계열사 숫자를 따지며 제재하는데 첨단 분야와 관련해선 전향적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ㅡ기업의 조직 문화 문제도 있을 텐데.
“우리는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면 ‘선례가 있냐, 검증됐냐’고 묻는다. 종신형을 받은 죄수가 있다고 해보자. 이 죄수는 탈옥을 꿈꾸며 감방의 벽돌을 눌러보고 변기도 눌러보면서 기록을 쌓는다. 이후 또 다른 죄수들이 계속 300년을 누르면 후세대의 누군가는 감방 벽을 뚫고 탈옥을 하게 된다. 그러면 다른 죄수들도 그 길을 통해 나가게 되는 거다. 챗GPT 같은 대형언어모델(LLM)이 미국에서 나온 데는 1800년대부터 컴퓨팅과 관련해 축적해온 미국의 수많은 경험이 있다. 저는 이에 대해 ‘묵은 별빛’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눈에 닿아 반짝이는 별빛이 수년, 수십년, 수천년을 건너온 그 무수한 공간을 상상해보라. 세상의 모든 혁신은 수없이 도전한 뒤에 빛을 발하게 된다. 모든 혁신은 그러한 묵은 별빛인데, ‘묵은’을 빼고 ‘별빛’만 원해서는 안 된다. ‘종신형 죄수’ 비유를 중국에 갖다 대면 감방에 죄수 한 명이 아니라 1000명이 들어가 곳곳을 누르며 탈출구를 찾는 식으로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선진국이 해온 시간을 중국은 100분의 1 정도로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ㅡ우리나라는 어떻게 도전해야 할까.
“도전성을 더 높여야 한다. 미국처럼 선배가 기록한 족보, 경험이 있는 게 아니고 중국처럼 인해전술을 펼 수도 없다면, 감옥 한쪽에 거미줄이 낀 벽돌을 눌러보는 것처럼 더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실패와 시행착오를 경험을 쌓는 축적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공공부문이 테스트 베드를 제공하면서 스타트업 등의 시행착오를 떠안아줘야 한다. 민간 기업에 엔비디아 칩 대신 벤처 제품을 시험적으로 써보라고 강요할 순 없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적용해 쓰긴 어렵다. 반도체와 AI 기술 시대를 연 미국도 처음에는 국방부가 국가 예산을 동원해 민간에 테스트 베드를 제공하며 기술 혁신을 이끌어왔다.”
ㅡ실험적인 걸 다 해볼 수는 없지 않은가.
“한 기업인이 제게 ‘직원들이 하자는 건 황당한 것도 다 해봐야 하느냐’고 물은 적 있다.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다. 수십년, 수백년간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내며 스케일업을 해온 곳에는 매뉴얼이 있다. 경험이 축적된 만큼 시행착오도 적게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에 대한 안목이 있는 것이다. 어떤 아이디어든 우리를 거치면 기가 막힌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 곳이 글로벌 챔피언들이고, 그런 국가가 선진국이다. 아직 우리에겐 그런 매뉴얼이 없다.”
ㅡK팝은 예외적인 사례인가.
“K팝은 2000년대 보아부터 원더걸스, 현재 방탄소년단(BTS)까지 경험을 축적하며 빛을 발한 사례다. 정부의 관심이 적은 외곽에서 민간이 자생적으로 스케일업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ㅡ한국 경제의 취약한 고리를 꼽는다면.
“수입?가공을 통해 완제품을 수출하는 경제 모델로는 글로벌 밸류체인의 변동성에 취약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우방국인 덴마크에 그린란드 매입을 강요하는 자국 중심 시대를 맞아 불확실성에 노출되는 게 대외적으로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대내적으로는 AI발 실업이 인구 문제보다 심각하다. 어떤 직업 분야가 AI로 대체될지에 대한 진단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과거 농업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제조업으로 갔다가 공장 자동화로 다시 서비스업으로 옮겼다. 그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서비스업에서도 밀려난 사람들을 받아줄 새 분야를 만들어야 한다.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투입을 걱정하는 현대차 노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AI발 실업은 5년 전만 해도 먼 미래로 생각됐으나, 최근 실리콘밸리 상황을 보면 곧 닥쳐올 현실이다. 특히 한국은 약 2600만명의 상용 근로자 대부분이 과거 방식으로 일해 충격이 더 클 수 있다. 기업들은 효율성을 추구하며 고용을 줄이려 할 것이다. AI를 활용해 인간의 능력을 증강시키는 방식으로 직업을 재조정하도록 힘써야 한다.”
ㅡ로봇세를 도입해 기본소득을 주는 방법도 있을 텐데.
“한참 뒤의 일과 지금 당면한 가까운 미래를 구분해 생각해야 한다. 당장 AI발 실업의 충격이 코앞에 닥치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새로운 시장과 산업을 창출하기 위해 국민적 인식 전환과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대구 계성고 ●서울대 학사·석사·박사 ●한국생산성학회 회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대통령비서실 경제과학특별보좌관 ●서울대학교 공학전문대학원(기술경영경제정책대학원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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