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마다 문 닫힘 기다리면 업무 시간 1시간 이상 늘어나는 구조…현장에선 “밥 먹을 시간 뺏는 격”
지자체 권고안도 ‘원론적 수준’에 그쳐…결국 입주민·택배사 간의 깊은 이해, 구체적 협의가 관건
“띵동.”
15층 도착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택배 기사 A씨의 손은 반사적으로 ‘닫힘’ 버튼을 향해 날아갑니다. 양손 가득 든 상자 무게만 10kg.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다음 층 버튼을 연달아 누르려던 찰나, 버튼 위에 붙은 안내문 한 장에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합니다.
“여러 층 누르지 마세요.” 정중한 문구지만, A씨에게는 그 어떤 경고장보다 무겁게 다가옵니다. 층마다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다시 잡아야 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속 시계바늘은 속절없이 돌아갑니다. 오늘 배송해야 할 물량은 300여개. 해가 지기 전에 끝내려면 그에게 ‘1분 1초’는 곧 돈이자 생존입니다. 최근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이 작은 안내문이 우리 사회에 ‘효율’과 ‘배려’ 사이의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버튼 연타’는 생존 본능…효율성 2배 차이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것도 갑질 아파트인가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오며 논란에 불이 붙었다. 게시글 작성자가 공개한 사진 속 안내문에는 “택배 및 배달 기사님들 노고에 항상 감사드린다”는 인사와 함께 “승강기를 잡아두기 위해 여러 층 버튼을 누르면 입주민 대기 시간이 길어진다”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단순한 에티켓 요청처럼 보이지만, 현장의 속사정을 뜯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택배 기사들에게 엘리베이터 버튼 조작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생존 기술’에 가깝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닫힘 버튼을 누르거나 배송할 층을 미리 눌러두는 행위는 철저한 ‘시간 싸움’의 결과다.
4일 전국택배노조 실태조사 등을 종합해보면 고층 아파트 배송 시 엘리베이터를 한 번에 잡고 이동하는 것과 매번 호출하는 것의 시간 차이는 1.5배에서 많게는 2배 이상 벌어진다.
현재 택배 기사 1인당 하루 평균 배송 물량은 약 250~300건에 달한다. 엘리베이터 대기 시간이 층마다 1분씩만 늘어져도, 하루 전체 업무 시간은 1시간 이상 연장되는 구조다. 현장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내 시급도 멈춘다”는 자조가 나오는 이유다.
한 택배 기사는 “입주민들의 불편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분 단위로 쪼개서 일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버튼을 누르지 말라는 것이 곧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라’는 말처럼 들릴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정중한 부탁” vs “보이지 않는 갑질”
안내문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입주민 입장에서 출근길이나 바쁜 시간대에 승강기가 층마다 서 있으면 분통이 터지는 것도 사실이다.
안내문 작성자 역시 “서로 불편한 애매모호한 상황”이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일각에서는 “욕설이나 강압적인 표현이 없으니 갑질이라 보기 어렵다”며 정중한 부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여론의 무게추는 조금씩 ‘배려’ 쪽으로 기우는 모양새다.
국민권익위원회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0% 이상이 “택배 배송 편의를 위해 아파트 단지 내 지상 출입이나 엘리베이터 이용 보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택배가 이미 생활 필수 서비스로 자리 잡은 만큼,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2024~2025년 사이 일부 고급 아파트에서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금지하거나 승강기 사용료를 부과하려다 철회한 사례가 빈번했다. 이번 안내문 역시 물리적인 제재는 없었지만, 배송 효율을 떨어뜨려 기사들의 노동 강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압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상생 가이드라인 부재…결국 ‘사람’의 몫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중재할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국토교통부가 ‘공동주택 배송 갈등 관련 가이드라인’ 마련에 나섰다. 서울시와 경기도 등 지자체가 권고안을 냈지만, 버튼 조작 방식 같은 ‘디테일’까지 규정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서울시 공동주택관리 준칙 등에는 ‘공용부분의 이용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배송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규정만 있을 뿐이다. 결국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와 택배사 간의 협의, 주민들의 이해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시스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일부 신축 아파트처럼 택배 전용 엘리베이터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물량이 몰리는 특정 시간대에는 기사들의 승강기 독점 사용을 한시적으로 양해하는 ‘택배 타임’ 운영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저도 주민들 마음 이해합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설 때마다 제 심장도 덜컥 서는 것 같아요.”
택배 상자를 다시 들어 올리는 기사의 등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야속하게 닫혔다. 상자 하나가 현관 앞에 놓이기까지 누군가는 1분 1초와 전쟁을 치른다. ‘효율’과 ‘배려’ 사이, 우리 사회의 엘리베이터는 지금 몇 층에 멈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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