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남정훈 기자] 흔히 배구를 ‘세터놀음’이라고 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점프력과 파워를 보유한 공격수라도 세터의 토스가 타점을 살려주지 못하고, 여러 각을 낼 수 있게 쭉 뻗어오지 않는다면 상대 블로킹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공격수들의 스파이크는 세터들의 토스라는 독립 변수에 종속된 변수인 셈이다.
세터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이유가 있다. 올 시즌 현대건설의 예상을 깬 고공행진도 배구는 세터놀음이란 명제를 증명하고 있다는 얘기가 하고 싶어서였다. 그 주인공은 국가대표 주전세터이자 V리그 최고 세터로 군림하고 있는 김다인(27)이다.
2024~2025시즌을 마친 뒤 현대건설은 전력 누수가 심했다. FA 최대어로 평가받았던 미들 블로커 이다현이 흥국생명으로 이적했고, 아웃사이드 히터진의 뎁스를 책임져주던 고예림도 예상치를 뛰어넘은 몸값(3억7000만원)에 페퍼저축은행으로 둥지를 옮겼다. 2010년부터 현대건설에서 뛰며 현대건설을 대표하던 스타였던 최고참 황연주도 현역 연장을 위해 도로공사행을 택했다. 게다가 2023~2024시즌 챔프전 우승의 주역 모마(現 도로공사)와 결별하고 데려온 카리 가이스버거(미국)도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인해 비시즌 동안 제대로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최근 네 시즌간 챔프전 우승 1회, 정규리그 우승 1회(2021~2022시즌, 코로나19로 포스트시즌 미개최) 등 봄배구 개근을 했던 현대건설은 약체라는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현대건설은 시즌 전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공행진을 펼치고 있다. 2라운드까지 6승6패로 5할 승률을 거뒀던 현대건설은 3라운드 6전 전승으로 시동을 걸더니 2025년의 마지막날인 31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흥국생명과의 4라운드 맞대결에서도 풀세트 접전 끝에 3-2 승리를 거두며 연승행진을 ‘8’로 늘렸다. 승점 38(13승6패)이 된 현대건설은 한 경기 덜 치른 선두 도로공사(승점 40, 15승3패)와의 격차를 줄임과 동시에 3위 흥국생명(승점 30, 9승10패)와의 격차를 벌리며 2위 수성 가능성과 선두 도약의 가능성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날도 김다인의 토스 배분은 적절했다. 현대건설은 카리(23점), 이예림(16점), 자스티스(15점), 양효진(15점)까지 주전 네 명이 고른 득점을 가져간 반면, 흥국생명은 레베카가 55.17%의 높은 공격 성공률로 양 팀 통틀어 최다인 33점을 퍼부었지만, 나머지 선수들의 화력지원이 부족했다. 피치(10점)를 제외하면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선수가 없었다. 5세트 10점대 막판 상황에서 레베카의 공격 2개가 양효진에게 막힌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흥국생명의 공격 루트가 레베카로 단순화됐기에 나왔던 블로킹이었다. 반면 현대건설은 매세트 최고 득점자가 바뀔 정도로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지 않는 배구를 보여줬다. 승부는 여기에서 갈린 셈이다.
경기 뒤 김다인은 이예림, 카리와 함께 인터뷰실을 찾았다. 김다인은 “감독님께서 경기 전에도 크리스마스 때처럼 ‘오늘도 좋은 날을 만들어보자’고 하셨는데, 승리로 그렇게 될 수 있어 다행이다”라면서도 “크리스마스도 지났는데 크리스마스 유니폼을 계속 입어야하는지 의문”이라며 특유의 4차원스러운 승리 소감을 밝혔다.
김다인은 3라운드 전승을 이끈 공을 인정받아 3라운드 MVP로 선정됐다. 기자단 투표 34표 중 12표를 받아 9표씩을 얻은 같은 팀 선배인 양효진과 지젤 실바(GS칼텍스)를 제쳤다. 이날 경기 전 시상식을 가졌던 김다인은 “우선 기자님들께 제게 투표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면서 “저희가 선수 하나에 의존하기보다는 팀으로 잘했기 때문에 제가 대표로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팀원들게 고맙다. 그래서 상금은 팀원들을 위해 쓰려고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대건설의 주축 공격수들인 카리와 정지윤, 양효진은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다. 이날도 정지윤은 선발로 나서지 못하고 교체로만 잠깐 코트를 밟았다. 카리와 양효진은 평소 볼훈련을 거의 소화하지 못하고, 경기 전날 맞춰본 뒤 경기를 치르는 일이 다반사기도 하다. 이들에게 공을 올려야만 하는 김다인 입장에선 부담스런 상황이다. 이에 대해 묻자 김다인은 “노파심이라고 해야할까. 걱정이 되긴 하는데, 경기 중에는 그런 생각을 최대한 지우려고 하고 있다. 그냥 우리 공격수들을 믿고 플레이하자는 마음으로 한다. 계속 의심하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곤 한다. 그래야만 경기에 몰입할 수 있다. 다행히 잘 때려주는 공겨수들에게 감사하다”라고 설명했다.
이날 경기 전 강성형 감독은 올 시즌 현대건설이 낮고 빠른 플레이를 주로 구사하는 팀 컬러로 변화했고, 이를 주도하는 김다인이 지난 시즌보다는 배구를 더 재밌어한다고 얘기했다. 이에 대해 묻자 김다인은 “더 재밌긴 하다. 높은 플레이를 하다보면 아무래도 블로킹이 따라붙기 쉽기 때문이다. 낮고 빠르게 하면 블로킹을 따돌리기도 좋고, 저 역시도 낮고 빠른 토스를 선호한다. 우리 공겨수들도 빠른 공격을 선호해서 잘 맞는 것 같다”라고 답했다. 2026년을 맞아 바라는 점이나 소망을 묻자 김다인은 “내년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배구를 했으면 한다. 기복없는 세터가 되고 싶다. 제 개인적에는 큰 욕심이 없다. 팀이 잘 됐으면 한다”라고 말을 남긴 뒤 인터뷰실을 떠났다.
개인적인 궁금함이 생겨 인터뷰실 밖에서 따로 김다인을 만났다. 2017~2018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4순위로 현대건설에 지명된 김다인은 데뷔 후 세 시즌은 당시 주전세터였던 이다영에게 가려 백업에 머무르며 세 시즌 간 고작 6경기 출전에 그쳤다. 이다영이 흥국생명으로 이적한 2020~2021시즌에야 주전 세터로 뛰게 됐고, 이 때문에 올 시즌을 마치고 생애 첫 FA 자격을 획득한다. 데뷔 때부터 FA 일수를 채운 선수들보다는 FA 자격 획득이 3년이나 늦어진 셈이다.
가뜩이나 FA 획득도 늦어졌는데, 받을 수 있는 돈도 줄었다. 올해까지는 여자부 개인 상한액은 8억2500만원(연봉 5억2500만원+옵션 3억원)이었지만, 차기 시즌부터는 상한액이 5억4000만원(연봉 4억2000만원+옵션 1억2000만원)으로 대폭 축소됐다. V리그 NO.1 세터인 만큼 예전의 상한액이 유지됐다면 타팀의 영입전 참전 여부에 따라 맥스 혹은 6~7억원대의 큰 계약도 가능했던 김다인이기에 아쉬울 법 하다.
개인 상한액 축소가 아쉽지 않느냐 묻자 김다인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어요. 아쉽지 않아요”라고 고개를 저은 뒤 “시즌 끝나면 FA라는 건 알지만, 지금 FA에 대해 별다른 생각도 없어요. 그저 경기와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평소에 물욕이 없는 편이냐’라고 묻자 “그런 건 아닌데, 제겐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배구를 더 잘 하고 싶고, 더 재미있게 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개인 상한액 축소 덕분에 현대건설 구단에서는 김다인을 더 적은 돈으로 잡게 되어 좋아하고 있다’라고 전하자 인터뷰를 지켜보던 구단 관계자를 샐쭉 쳐다보던 김다인은 “저 쉽게 잡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하셨어요?”라며 볼멘소리를 하던 김다인이었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줄잇는 ‘脫서울’](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31/128/20251231513189.jpg
)
![[세계포럼] “여소야대 땐 또 계엄 할 건가”](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31/128/20251231513168.jpg
)
![[세계타워] ‘합리적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31/128/20251231513064.jpg
)
![[사이언스프리즘] 불과 말의 해, 병오년](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31/128/20251231513094.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