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지키면서도 현장 살피는 지혜 중요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을 읽다 보면 무릎을 치게 되는 대목을 자주 만난다. 고려의 수령 이보림(李寶林) 이야기가 그렇다. 우왕 때, 경산부(지금의 경북 성주)의 수령이었던 그는 길을 가다 민가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들어보니 남편을 잃은 부인의 곡(哭)소리였으나, 슬픔이 담겨있지 않았다. 이보림은 함께 가던 관리에게 “이 여인의 울음소리가 슬프다기보다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지 않으냐”고 물은 뒤 체포해 심문하게 했다. 그 결과 그녀가 간부(奸夫)와 공모해 남편을 살해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 다른 판결은 더 인상적이다. 한 집의 소가 이웃 논에 들어가 벼를 뜯어 먹었고, 며칠 뒤 그 소의 혀가 잘린 채 발견되었다. 소 주인이 논 주인을 고소했으나 목격자도 증거도 없었다. 그 소가 벼를 뜯어 먹은 곳이 그 논만은 아니어서 다툼만 오갈 뿐 시비를 가릴 길이 막막해 보였다. 이보림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소를 관아로 끌어오게 했다. 며칠간 물을 주지 않은 뒤 동리 사람들을 모아 간장 탄 물그릇을 들고 차례로 다가가게 했다. 갈증에 시달리던 소는 냄새를 따라 다가왔지만, 논 주인의 차례가 되자 갑자기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보림은 “이로써 죄인이 드러났다”고 말했고, 논 주인은 끝내 범행을 실토했다.
그의 판단력이 빛난 또 다른 사례도 있다. 말 임자가 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웃의 보리밭을 망친 일이 발단이었다. 보리밭 주인이 관아에 고소하려 하자 말 임자는 “여름에 보리가 여물면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했다. 보리밭 주인은 그 말을 믿고 고소를 거두었다. 여름이 되자 말이 뜯어먹은 자리에서 다시 싹이 올라왔고, 말 임자는 이를 이유로 약속을 부인했다. 결국 보리밭 주인은 관아의 문을 두드렸다.
수령 이보림은 두 사람을 관아 뜰로 불러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말 임자는 땅에 앉히고 보리밭 주인은 세운 채 목표 지점까지 달리게 했다. 서 있던 보리밭 주인은 곧바로 뛰었지만, 앉아 있던 말 임자는 한 걸음 늦었다.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말 임자에게 이보림이 말했다. “보리도 또한 그러하다.” 뜯어먹힌 뒤에 다시 돋은 싹이 처음부터 자란 보리와 같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말 임자를 곤장으로 징벌하고, 그의 밭에서 난 보리를 보리밭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나는 이보림의 판결을 ‘우리 역사 10대 명판결’로 꼽는다. 이 사례들은 명판결의 조건을 잘 보여준다. 그는 민생의 현장에서 판단했고, 자연의 이치를 관찰해 증거로 삼았으며, 형벌을 내리기에 앞서 당사자가 스스로 깨닫게 했다. 어떤 법을 적용할지를 따지기 전에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를 먼저 상세히 살폈다. 그래서 그의 판결은 패소한 자조차 억울해하지 않았다. 세종이 말한 것처럼, 좋은 판결이란 법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인정에 부합해 마음으로 승복하게 만드는 판결이다.
그렇다면 이보림은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까. ‘고려사절요’는 그를 “엄정하고 곧으며 행정에 재능이 있는 인물[有政事才]”로 기록한다. 그는 남원 부사로 재임하며 포탈된 세금을 거두고 둔전을 정비해 관청의 경비를 마련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과도한 징수가 이뤄지는 일을 막았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그를 “소송을 잘 판결한 사람[善?訟]”이라 평가했다.
이런 수령이 되는 방법으로 정약용은 ‘경사(經史) 학습’을 들었다. ‘흠흠신서’ 서문에서 그는 형사사건을 다루다 보면 더러 법 조항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고 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융통성을 가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 경전과 역사서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공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려 최고의 수령’ 이보림은 조부 이제현에게서 이러한 경사 학습법을 익혔고, 그것을 재판의 현장에서 구현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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