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쩍 마른 일력
너는 아직 11월
지나간 날들 뒤늦게 다 뜯어내고 나니
마침내 오늘
한층 더 마른 일력
연말에 약속 몇 개
한 개는 가족과 함께
두 개는 모르는 남과 함께
한두 개는 나 자신과 함께
그렇게 일하고 놀고 먹고 마시고 떠들다보면
좀더 말라 있을 일력
더는 마를 여력도 없을 때
12월은 사라지고
일력은 일 년짜리 생을 마감하리
(중략)
마지막 페이지는 이미 정해져 있음을
매년 시각적으로 물리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체감시켜주는 일력이
오늘 임무를 완수하고
마지막 눈을 감았다
원래 없던 눈을
누구보다도 검게 꼭
2025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일력은 비쩍 마르다 못해 더는 마를 여력조차 없는 상태이겠다. 다행히도 나는 일력을 쓰지 않는다. 쓸쓸한 마지막 모습을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곁에 놓인 탁상달력을 흘깃거린다. 색색의 메모가 휘갈겨져 있고 포스트잇도 몇 장 붙어 있다. 연말의 흔한 약속들. 지켜졌거나 지켜지지 못한 각각의 의미들. 굳이 헤아리자니 달력의 마지막 또한 쓸쓸하긴 마찬가지다. 곧 짧은 생을 마감할 달력을 통해 새삼 한 해의 끝을 실감한다.
어딘가에서 얻은 새 달력을 찾아 펴면 쓸쓸함은 차차 가시려나. 새해를 맞은 후에도 어쩐지 지난 달력을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당분간 가까운 곳에 놓아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억해야 할 어떤 날짜, 어떤 사건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간의 임무를 묵묵히 완수한 종이 뭉치, 이 한 권의 노고를 쉽사리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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