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코끼리를 머릿속으로 그리다 나온 글자가 ‘상(人+象=像)’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이를 ‘상상(想像)’이라고 부른다.
인간만이 가진 이 상상의 힘을 무대 위에서 증명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왜 필요한지 묻는 작품 ‘라이프 오브 파이’가 한국 초연의 막을 올렸다. 맨부커상 수상작인 얀 마텔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재밌으면서도 삶과 종교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원작을 중국계 이안 감독이 아름다운 영상미를 갖춘 영화(2012년)로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2019년 영국 셰필드에서 다시 연극으로 만들어진 후 2021년 영국 런던 웨스트 엔드, 2023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로 옮겨가며 올리비에상 5개 부문과 토니상 3개 부문을 석권한 글로벌 화제작이 됐다.
바다에서 사라진 일본선적 화물선의 유일한 생존자, 열일곱 살 소년 파이로부터 사고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 조사관과 캐나다 영사가 방문한 병실에서 무대는 시작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던 부친이 캐나다 이민을 결정하면서 파이는 동물원 동물들과 함께 화물선에 오르게 된다. 순조롭던 항해는 어느 밤 불어닥친 태풍으로 끝난다. 구명정에 오른 생명은 넷. 파이가 들려주는 227일간의 표류기는 여기서부터 두 갈래로 뻗어나간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태평양 한가운데를 227일 동안 떠도는 환상적 생존담이다. 인간의 이성과 본능이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싸우다 타협하지를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인 하이에나를 다시 호랑이가 죽이고, 소년은 이 호랑이와 함께 망망대해 보트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빗물을 받고 바다거북이 피를 마신다.
그러나 “믿을 만한 이야기를 말하라”는 조사관 추궁에 파이는 전혀 다른 두번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이번에는 동물 대신 선원과 승객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폭력과 희생, 식인까지 암시되는 잔혹한 생존기다. 믿을 만하나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선원, 어머니, 요리사는 각각 앞서 동물들에 대응되는 존재로 배치되고,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결국 파이 자신의 내면이다.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맞부딪쳐야 했던 야수적 자아가 ‘리차드 파커’로 실체화한 것.
두 이야기 중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듣는 이 선택이다. 파이는 두 이야기를 모두 내놓은 뒤 “어느 이야기를 믿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진다. 상상은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가 아니라, 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의미를 다시 써 내려가는 힘이라는 것이다.
상상의 힘을 무대 위에서 가장 선명하게 구현하는 장치는 퍼펫이다. 구명보트 위에서 파이와 대치하는 벵골 호랑이는 실제 동물의 해부학적 구조를 바탕으로 설계됐다. 가벼운 재질과 나무 골격, 탄성 코드로 이루어진 몸체를 세 명의 퍼펫티어가 조종한다. 몸체를 등에 걸친 한명이 앞발을 내딛으며 큰 움직임을 연기하고 다른 한 명은 머리를 움직여 파커의 시선과 표효 등을 연기한다. 다른 한 명은 뒷 다리와 꼬리를 맡는다. 처음에는 사람의 몸과 막대, 기계적 구조가 먼저 보이지만, 장면이 진행될수록 관객의 시선은 점차 인형의 눈과 호흡, 꼬리의 떨림에만 집중하게 된다.
상상의 힘을 무대위에서 구현하는건 호랑이만이 아니다. 오랑우탄, 하이에나, 기린, 얼룩말, 바다거북 등 다양한 퍼펫이 제 몫을 연기하는데 작대기만으로 움직이는 물고기조차 정말 바다에서 솟아오른 듯한 생동감을 온 몸으로 뿜어낸다. 의도하지 않아도 퍼펫을 움직이는 퍼펫티어 모습이 눈 앞에서 지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은 믿고 싶은대로 본다.
여기에 프로젝션 영상 투사가 더해지면서 만들어낸 이미지는 병실을 한 순간에 물결 일렁이는 바닷속으로 바꾸거나 폭우가 몰아치는 선상, 파도가 넘실거리는 대양 한가운데로 관객을 데려간다. 상상의 힘이 눈앞에서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향연이다. 연출진이 “이 작품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재료는 관객의 상상력”이라고 강조하듯, 관객은 자신의 마음속 이미지로 바다를 채우고, 나무와 폼으로 된 호랑이에 숨을 불어넣는 공동 창작자가 된다.
인간은 망각없이 살 수 없다. 상상도 마찬가지다. 삶의 상처와 공포를 어떤 이야기, 어떤 이미지로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우리의 현실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라이프 오브 파이’는 소년·호랑이의 표류기를 통해 인간에게만 허락된 상상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생존수단인지 단단하게 일깨운다. 불가능을 신념과 희망으로 이겨낸 파이의 여정을 경이로운 무대 예술로 보여준 작품이다. 서울 GS아트센터에서 3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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