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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한페이지 넘기는 제주 닭머르해안을 걷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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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2-06 05:00:00 수정 : 2025-12-05 18:26:49
제주=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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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머르해안 억새·노을·바다 어우러지는 풍경 장관/ 화순곶자왈·안덕계곡엔 태고 신비 가득/자청비 설화 만나는 안덕면 광평리에  고배기동산/울창한 삼나무숲 걸으며 힐링

 

닭머르해안.

은빛으로 출렁댄다. 마지막 가을빛 머금은 억새들 만추의 잔향 흩뿌리며. 억새밭 사이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의 스산한 숨소리는 옷깃을 여미게 만들고. 붉은 태양은 하루가 다르게 서둘러 바다로 내려앉으니 제주도 이제 늦가을과 헤어질 때. 푸른 바다, 억새, 바람이 어우러진 닭머르해안길을 걸으며 계절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제주에서 떠나보내는 만추

 

12월. 이제 만추마저 놓아줘야 하는가 보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니. 아쉽다. 바쁘다는 핑계로 올해도 제대로 가을을 즐기지 못했는데. 떠나는 가을 서러워 제주로 향한다. 공항에 도착하자 아직 한낮의 태양은 포근하다. 차를 몰아 동쪽으로 30분을 달리면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닭머르해안에 닿는다. 제주의 억새를 즐기려면 높은 오름에 힘겹게 올라야 하는데 닭머르는 그런 수고가 필요 없다. 해안에 무성한 억새밭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입구에 주차공간도 마련돼 있다.

 

닭머르해안 억새.
닭머르해안 억새.

오솔길로 들어서자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 바다 풍경에 탄성이 터진다. 저 멀리 바다로 향해 뻗어나간 능선 끝에 운치 있는 정자를 품은 전망대와 푸른 바다까지 어우러지니 만추를 떠나보내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억새밭을 느리게 걷는다. 사각사각 소리 내며 억새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의 맥박. 갯바위를 때리는 파도의 노래. 눈을 감고 숨을 쉬니 제주 청정 자연이 폐 속 깊은 곳까지 전달된다.

 

닭머르해안 전망대.

거센 바람 부는 전망대에 서자 닭 볏처럼 삐쭉삐쭉한 모습의 기암괴석이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오솔길 양옆으로 억새밭이 날개처럼 펼쳐졌다. 닭머르 이름 유래가 재미있다. 닭이 흙을 파헤치며 양쪽 날개를 펼친 모습과 닮아서 닭머리의 제주 방언 닭머르라는 이름을 얻었다. 입구에서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닭의 목 부분, 전망대는 머리, 바닷가의 기암괴석은 닭머리의 볏에 해당한다. 전체적인 지형은 닭이 알을 품은 것 같기도 하고, 병아리를 보호하기 위해 날개를 펼친 모습도 닮았다. 닭머르해안은 제주의 숨은 ‘노을맛집’이기도 하다. 해 질 무렵 이곳을 찾으면 정자, 갈대, 기암괴석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

 

닭머르해안 전망대에서 본 닭볏 모양 바위.

 

 

남생이못.

닭머르해안은 제주 해안누리길 50코스 시작점이며 닭머르∼신촌포구∼신촌리어촌계까지 1.8㎞ 거리로 편도 30분 정도로 걸린다. 자연을 그대로 잘 살렸기에 수려한 제주의 풍광을 즐기기 좋다. 닭머르해안 인근에 아담한 남생이못도 자리 잡고 있어 함께 묶어서 산책하기 좋다. 아주 오래전 신촌리 청년들이 소와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만든 인공 연못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다양한 생물과 철새들이 노니는 습지생태관찰원이 됐다. 연못을 조성한 뒤 거북과 비슷하지만 조금 작은 남생이가 서식하면서 남생이못으로 불리게 됐다.

 

화순곶자왈.

◆태고 신비 가득한 화순곶자왈·안덕계곡

 

제주의 자연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곶자왈’로 가면 된다. 곶(숲)과 자왈(암석과 덤불이 뒤엉킨 땅)을 합친 단어로 제주 고유의 숲 지형을 뜻한다. 화산 활동으로 흘러내린 점성 높은 용암이 만든 크고 작은 바위들이 뒤엉키면서 울퉁불퉁한 요철 지형의 곶자왈이 만들어졌다. 일반 숲이나 농경지로는 사용하기 어려운 지형이라 자연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특히 보온·보습 효과가 크며, 다양한 미세기후가 존재한다. 덕분에 하나의 숲에서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까지 여러 기후대의 식물이 공존하는데, 이는 전 세계에서 제주가 유일하다.

 

화순곶자왈.

대표적인 곳이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곶자왈이다. 야자매트가 깔려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에 들어서자 탱자자무, 산유자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반긴다. 이끼로 뒤덮인 바위, 나무뿌리, 덩굴들이 마구 뒤엉킨 모습은 볼수록 경이롭다. 마치 인간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태고의 신비의 가득한 숲에 서 있는 느낌이다. 화순곶자왈 산책로는 숲속을 걷는 약 1.5㎞ 코스와 전망대에 닿는 코스로 이뤄졌다. 전망대에 오르면 숲 너머 들판, 방목지, 산방산, 한라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풍경을 얻는다. 화순곶자왈은 해발고도 492m 병악오름에서 시작해 화순리 방향으로 약 9㎞에 걸쳐 분포돼 있고 평균 1.5㎞ 폭으로 산방산 근처의 해안지역까지 이어진다. 멸종위기 식물인 개가시나무, 새우난, 더부살이고사리와 세계적인 희귀종 긴꼬리딱새, 제주휘파람새 등 50여종의 동식물이 살아간다.

 

안덕계곡.

 

 

화순곶자왈 인근 안덕계곡에도 제주만이 지닌 남다른 매력이 가득하다. 안덕면 감산리 마을을 지나 바다로 유입되는 창고천 하류에 형성된 안덕계곡은 한대오름 주위에서 발원한 물이 흐른다. 계곡으로 들어서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우산 하나 받쳐 들고 걸으니 떨어지는 빗소리가 고요한 계곡에 울려 퍼지며 여행의 낭만을 더한다. 안덕계곡은 병풍처럼 서 있는 기암절벽과 평평한 암반바닥에 유유히 흐르는 물이 어우러지는 협곡이 절경이다. 계곡 전체 길이의 절반 정도가 이런 깎아지른 듯한 수직 절벽으로 이뤄져 용암 동굴 천장이 붕괴하면서 형성된 계곡으로 짐작된다.

 

안덕계곡.

곳곳에 자연 동굴이 형성된 점으로 미뤄 선사시대에 삶의 터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곡의 양쪽에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호박나무, 보리장나무 등 난대 수목의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뤘다. 각종 고사리류, 희귀식물인 담팔수와 상사화 등 300여종이 식물이 살아가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런 원시적인 독특한 풍경은 많은 드라마의 사랑을 받아 ‘추노’와 ‘구가의 서’ 등 다양한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빼어난 절경에 반해 추사 김정희 등 많은 학자도 안덕계곡을 찾은 것으로 전해진다.

 

안덕면 창천리 달팽이식당 정식.

◆자청비 설화 만나는 고배기동산 삼나무숲

 

여행은 때로는 맛으로 기억된다. 오후 1시 넘어 안덕계곡에서 차로 5분 거리 안덕면 창천리 현지인 맛집 달팽이식당으로 들어서자 거의 만석이다. 메뉴는 1만5000원짜리 달팽이정식 단 한 가지. 청국장, 직화 석쇠 불고기, 보리밥, 밑반찬으로 구성되며 어머니가 차려주는 집밥 느낌의 정갈한 한상으로 나온다.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만든 청국장이 구수해 밥에 쓱쓱 비며 먹으면 순식간에 한 그릇이 빈다. 무엇보다 오이, 두부, 계란장 등 반찬의 간이 자극적이지 않아 제주 청정 자연을 먹는 느낌이다. 불고기는 불맛이 제대로 살아있다. 오전 11시에 문을 열며 마지막 주문은 오후 3시다.

 

안덕면 광평리 고배기동산 삼나무숲.

달팽이식당에서 차로 20분 거리 안덕면 광평리에는 제주 사람도 잘 모르는 아름다운 숲이 보석처럼 숨어 있다. 고배기동산에 자생하는 삼나무숲이다. ‘제주메밀 비비작작면’으로 입소문 나 늘 긴 줄을 서야 하는 메밀 맛집 한라산아래첫마을을 운영하는 영농조합이 마을 사람들과 꾸며가는 숲으로 식당 뒤쪽 언덕에서 만난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나간 삼나무 수천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룬 풍경이 장관이다. 가끔 햇살 한 줌 어렵게 숲을 비집고 삼나무 몸통으로 쏟아지자 싱그러운 생명력을 더한다. 20대 커플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서로의 예쁜 시간을 사진으로 남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 즐기며 힐링하기 좋은 곳이다. 광평리 마을은 ‘제주 4·3 사건’ 때 폐허가 됐는데, 마을 사람들이 1955년 재건하면서 삶의 터를 내어준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삼나무숲을 조성했다.

 

고배기동산 삼나무숲.

광평리는 ‘제주 오곡의 여신’ 자청비 설화의 고향이다. 옛날 광평리에서 살던 큰 부자 김진국 대감이 오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자주부인이 절에 시주하고 불공을 드린 뒤 딸을 낳았고, ‘자청하여 낳은 딸’이란 뜻으로 이름을 자청비로 지었다. 왕이뫼오름에 살던 옥황상제 아들 문국형 도령이 광평리를 지나다 행기소에서 허벅에 물을 담고 있던 자청비의 미모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둘은 혼인해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하늘나라에서 수확이 잘되는 오곡 씨앗을 얻은 자청비는 인간을 위해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제주 사람들은 그를 농경신으로 섬기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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