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 속에서도 ‘억 단위’ 결제를 아끼지 않는 최상위 소비층을 선점하기 위한 백화점들의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지고 있다.
전체 소비가 둔화하는 와중에도 ‘초고가 소비층’의 지갑만은 흔들리지 않으면서, VIP 고객이 사실상 백화점 실적을 결정짓는 핵심 축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28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최근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은 잇따라 VIP 등급 기준을 상향하고, 혜택 체계를 정교화하는 개편안을 내놓았다.
롯데백화점은 내년부터 최상위 등급 ‘에비뉴엘 블랙’을 777명으로 한정하고, ‘에메랄드’ 기준도 연간 실적 1억원에서 1억2000만원으로 상향한다. 8000만원 이상 등급도 신설해 구간을 세밀하게 나눴다.
현대백화점은 기존 ‘자스민 블랙’(1억5000만원 이상) 위에 더 고도화된 최상위 등급을 신설할 예정이다.
신세계백화점은 올해부터 ‘블랙 다이아몬드’(1억2000만원 이상) 등급을 본격 운영하며 초고액 소비층의 충성도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시장 데이터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롯데백화점의 VIP 매출 비중은 2020년 35%에서 지난해 45%로 증가했다.
특히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VIP 매출 비중이 올해 처음 전체의 절반(52%)을 넘어서며, 개점 이후 최단기간 내 매출 3조원을 돌파했다.
◆“VIP가 매출의 절반”…백화점 실적 구조가 바뀌고 있다
VIP는 더 이상 ‘우수 고객’ 범주의 일부가 아닌 실적 변동을 좌우하는 주력 매출원이 됐다.
경기 침체기가 길어질수록 가격 탄력성이 낮은 고소득층의 소비가 더욱 중요해지면서, 백화점은 상위 1% 고객을 중심에 둔 구조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상위 1% 소비층이 매출을 견인하는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백화점은 VIP 기준을 더 정교하게 설계할 수밖에 없다”며 “과거엔 VIP를 넓게 포섭했다면, 이제는 ‘초(超)프리미엄 고객’을 더욱 좁게 선택해 차별화된 혜택을 부여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등급 세분화가 일으키는 소비 심리 효과도 크다.
라운지·주차·전용 행사 등 혜택이 단계별로 촘촘히 나뉘면서, 소비자들은 등급 상승을 하나의 투자이자 성취로 인식한다.
실제로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백화점 실적 팝니다”라는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연간 실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소비자가 남의 실적을 사서 자신의 등급을 올리려는 것이다.
시세는 실적 인정금액의 3~4% 수준, 연말에는 더 비싸게 거래되기도 한다.
또 다른 관계자는 “VIP 등급 간 미묘한 차이는 ‘조금만 더 쓰면 올라갈 수 있다’는 심리를 자극한다”며 “등급은 이미 하나의 사회적 지위이자 상징적 자산이 됐다. 소비자는 자신의 소비를 ‘지위 획득 비용’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1단계만 더”…소비자 심리 자극, 등급 전쟁 ‘가속’
VIP 전략은 단순한 구매 혜택을 넘어 하나의 브랜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전용 라운지, 프라이빗 쇼핑 행사, 개인 컨시어지 서비스 등을 통해 고객의 일상 경험까지 관리하며 장기적인 ‘락인(lock-in)’ 효과를 강화한다.
한 마케팅 전문가는 “초고가 소비층은 브랜드 충성도가 높다”며 “백화점은 단순히 프리미엄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닌 ‘멤버십 문화’를 판매하고 있다”고 전했다.
◆산업 구조는 이미 ‘양극화’…“VIP 경쟁, 더 치열해질 것”
국내 백화점 산업은 온라인·명품·아울렛 등 외부 변수로 인해 이미 외형 성장의 한계를 맞은 상태다.
이른바 ‘상위 1%’를 얼마나 오래 붙잡느냐가 백화점의 성장 지속성을 결정하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백화점 업계의 실질적 성장 동력은 초고액 소비층 확보뿐이다.
소비 양극화가 심해지는 구조 속에서, 백화점은 그 수혜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산업이다.
결제 실적이 중고 거래되는 현상은 제도적 허점을 보여준다.
허위 실적·대리 결제·부정 적립 등 부작용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이를 명확히 규율할 제도가 없다.
지금은 유통업체 자율 관리에 맡겨진 상태다.
실적 거래가 확산될 경우 등급 체계의 공정성이 흔들릴 수 있어 투명한 검증 절차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VIP는 하나의 문화…멤버십이 지위를 만든다
백화점 VIP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 군이 아니다.
전용 라운지와 전시·행사 초청, 맞춤형 서비스 등이 결합되면서 VIP는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계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명품 구매가 지위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멤버십 등급’이 더 강력한 상징이 됐다. VIP는 소비자가 아닌 문화 참여자다.
백화점들은 지금, 규모의 경제가 아닌 ‘질(質)의 경제’로 이동하고 있다.
많이 사는 고객이 아닌 ‘가장 많이·가장 비싸게 사는 고객’을 중심으로 구조가 재편되는 흐름이다.
VIP 등급은 앞으로 더 세분화되고, 더 희소해질 것이며, 혜택은 더욱 프라이빗해질 가능성이 크다.
백화점 헤게모니는 결국 누가 초고액 소비층을 더 오래, 더 깊게 묶어두느냐의 경쟁으로 귀결되고 있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한국판 장발장’에 무죄](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27/128/20251127519404.jpg
)
![[기자가만난세상] AI 부정행위 사태가 의미하는 것](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27/128/20251127519346.jpg
)
![[세계와우리] 트럼프 2기 1년, 더 커진 불확실성](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27/128/20251127519384.jpg
)
![[조경란의얇은소설] 엄마에게 시간을](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27/128/20251127519352.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