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역 서도역 메타세쿼이아·은행나무 단풍 절정/목조 대합실 건물·철길과 어우러진 만추 낭만 가득/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옆 앤케이갤러리 8월 오픈/달항아리 전시보고 도자 굽는 체험도/국내 최고 한옥 명장들 참여한 남원예촌에서도 가을 풍경 만끽
아주 오래된 철길을 걷는다. 스산한 늦가을 바람에 옷깃 여미며. 멈춰 선 시계처럼 빛바랜 대합실과 나무 벤치. 지나간 시간의 편린처럼 레일을 따라 놓인 침목. 더 이상 쓸모없이 덩그러니 놓인 이정표. 가 버린 날들처럼 이제는 더 오지 않는 기차. 쓸모를 다한 폐역은 고요하지만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 기차는 떠났지만 연인들이 찾아오니. 메타세쿼이아 주황색 낭만으로 물든 서도역에 섰다.
◆만추 낭만 가득한 서도역
나만 혼자 알고 싶은 곳이 몇 있다. 전북 남원시 사매면 폐역 서도역이 그렇다. 봄이면 수령 50년 넘은 벚나무가 무성하지는 않지만 아직 화사한 연분홍꽃 피우고, 여름에는 울퉁불퉁 근육질 사내 몸매를 닮은 메타세쿼이아가 철길 따라 햇빛 한줌 들지 않는 울창한 터널을 만든다. 요즘이 가장 아름답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서도역은 서정시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메타세쿼이아 덕분이다. 철길을 가운데 품은 거대한 나무들이 짙은 주황색으로 갈아입은 풍경은 흔치 않은 만추의 낭만을 선사한다.
입구로 들어서자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와 어느덧 이파리가 다 떨어진 느티나무 고목이 만추의 서정으로 안내한다. 낡은 단층 목조건물 대합실 출입구 지붕 위에는 한글과 한자를 위아래에 함께 쓴 간판 ‘서도역 書道驛’이 놓여 눈길을 끈다. 방향을 뜻하는 ‘서(西)’가 아니라 ‘글 서(書)’자라니. 1914년 서원리(書院里)와 도촌리(道村里)가 합쳐지면서 서도리가 됐는데, 과거 여러 서원이 있어서 서원리로 불렸단다. 마을 이름 덕분일까. 작가 최명희(1947∼1998년)의 유명한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이 바로 서도리로, 소설 주인공 청암부인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소설은 남원 매안 이씨 종가 며느리 3대의 가족사를 통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았으며 집필에 무려 17년이나 걸렸다.
소설 덕분인지 오랜 세월이 켜켜이 내려앉은 대합실 건물이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대합실 앞으로 철길이 길게 이어지고 그 길 끝에서 주황색으로 물든 메타세쿼이아 터널을 만난다. 오랜만에 엄마와 여행에 나선 20대 딸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철길을 거닐며 오붓한 모녀의 정을 나눈다. 연인들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다양한 포즈로 만추의 시간을 담는다. 메타세쿼이아는 단풍들 때 가장 예쁘지만 잎이 떨어져 수북하게 쌓이면 또 다른 수채화를 선사한다.
대합실 앞 나무 벤치는 빼놓을 수 없는 포토존. 여수와 경성 방향이 표시된 하얀 서도역 이정표, 철길, 대합실을 사람과 함께 담으면 아련한 시간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 낭만 가득한 풍경 덕분에 2018년 방영된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도 등장해 연인들에 인기를 끄는 명소가 됐다. 주인공 유연석(구동매 역)이 철길에 앉아 한성으로 가는 김태리(고애신 역)를 기다리던 장면을 바로 이곳에서 촬영했다.
1932년 준공된 전라선 서도역 대합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대합실이다. 전라선 철도를 이설하면서 2008년부터 폐역이 돼 철거될 위기에 처했지만 마을 사람들과 남원시가 역사와 부지를 매입한 덕분에 영상촬영장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대합실에는 발차시간표가 적힌 칠판이 내걸려 서도역을 오간 많은 이들의 사연을 전한다. 역장실도 꾸며 놓았고 드라마 장면이 담긴 사진들도 만난다.
◆도자기 만들고 미술관도 거닐고
남원에는 최명희 작가만큼 유명한 화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바로 남원 출신 김병종 작가다. 전통·현대·동서양을 아우르는 독자적인 화풍으로 한국화를 개척한 그는 ‘바보 예수’와 남원의 추억을 담은 ‘생명의 노래’ 시리즈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2018년 3월 개관한 어현동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자 모던한 순백색 미술관 건물에 탄성이 터진다. 사람이 고개 숙여 엎드리듯, 앞으로 툭 튀어나온 2층의 사각 통창 건물이 앞마당 계단식 연못 위에 데칼코마니로 담기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다.
전해갑 건축가가 총괄 기획한 건물로, 전북 완주의 인기 여행지 ‘아원고택’도 그가 설계했다. 납작 엎드린 듯한 모양의 ‘겸손한 미술관’으로 지어 자연의 아름다움에 잘 녹아들기를 원한 김 작가의 뜻이 건축 디자인에 반영됐다. 실제 미술관은 주변의 숲과 한 몸처럼 잘 어우러진다. 특히 갤러리 곳곳에 ‘숲멍’할 수 있는 통창을 마련한 점이 눈에 띈다. 창 앞에서 서자 소나무 숲과 멀리 보이는 지리산 능선, 푸른 하늘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고요한 사색의 시간으로 이끈다. 덕분에 미술작품은 물론 자연도 감상하면서 마음을 치유하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인기를 누린다.
어현동 산기슭은 앞으로 남원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이 될 것 같다. 지난 9월 김병종미술관 바로 옆에 역시 모던한 디자인의 ‘앤케이갤러리’가 문을 연 덕분이다. 도예가 김현철·한경숙 작가 부부와 딸인 시각예술가 김은형 작가가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마당 잔디밭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데, 남원을 대표하는 여행지 광한루원 연못의 물고기들을 의미한다. 갤러리로 들어서자 달항아리 작품들로 공간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남원에서 태어나 경기 이천에서 30년 넘게 흙과 불을 다룬 김현철 작가의 작품들이다. 그는 과거 도자기 가마터가 많았던 남원시 왕정동 만복사지 주변의 흙을 이용해 달항아리를 빚고 있다. 이곳의 흙은 입자가 곱고 점성이 뛰어나 가마에 굽는 과정에서 견고한 형태를 잘 유지하는 장점을 지녔다. 이에 예로부터 사찰에서 사용하는 일상용기 등의 주원료로 사용됐다.
김은형 작가는 도자기 굽는 과정에 파손됐지만 형태가 남은 밑받침 ‘굽’을 탑처럼 쌓은 ‘겹, 층’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 그 위에 가마에 불을 때는 소나무를 얹어 홀로는 서지 못하던 깨진 굽이 탑을 이룬 뒤 타자와 접촉을 통해 비로소 서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벽에 걸린 회화 ‘파동들’ 시리즈도 그의 작품이다. 청록빛 곡선, 흐릿한 경계, 번지는 색면으로 도자가 탄생하는 과정을 표현했다. 그는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예술가로 회화·드로잉·설치·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인다. 현재 전시 중인 ‘다시:흙으로부터’는 올해 연말까지 진행된다. 내년에는 폴란드 사진작가 미하우 시타와 시각예술가 안나 필라프스카 시타 부부의 작품과 멕시코 시각예술가이자 나탈리아 칼데론 등 수준 높은 해외작가들의 작품도 전시할 계획이다. 일반인들은 다양한 도자기를 만드는 체험도 할 수 있다.
◆간장게장 먹고 남원예촌 가볼까
남원은 미식의 도시다. 추어탕이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메뉴들이 즐비해 식도락가들을 유혹한다. 광한루원 인근 ‘또바기 한식’은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다. 1인 2만5000원짜리 암꽃게 정식을 주문하자 갈치구이, 갈치조림, 제육볶음, 계란찜이 푸짐하게 한상 차려 나온다. 계란찜으로 속을 데우고 밥 위에 간장게장 얹어 입으로 밀어넣자 감칠맛에 눈이 크게 떠진다. 간이 적당하고 고소해 밥 한 공기가 순식간에 비워진다. 여기에 매콤한 갈치구이와 제육볶음까지 곁들여지니 과식을 피할 수 없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남원예촌 구경에 나선다. 남원 여행자들은 주로 광한루원을 많이 찾는데 후문 바로 앞에 예쁜 한옥 숙소와 예스러운 골목으로 꾸민 남원예촌이 자리 잡고 있다. 오전 11시~오후 3시에는 외부에 개방돼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둘러볼 수 있다. 이곳은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문화재급 한옥스테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최기영 대목장 등 우리나라 최고의 한옥 명장들이 참여해 백제, 고려, 조선시대 전통 한옥을 그대로 재현했다. 덕분에 전통 한옥의 고즈넉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은은한 색을 자랑하는 황토벽도 눈에 띄는데 대나무, 황토, 짚을 미역과 다시마를 끓인 물로 반죽한 뒤 자연 건조했다. 황토벽은 표면의 미세한 구멍이 공기 중의 화학물질을 걸러 정화하며 습기와 온기를 자유자재로 머금고 내뿜어 늘 쾌적한 상태를 유지한다.
황토벽을 따라 장독이 줄지어 늘어섰고 사이사이로 재미있는 흙인형들이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한다. 2층 누각으로 지은 부용정 앞에는 연인이 손잡고 곱게 물든 단풍과 한옥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가을 풍경을 즐긴다. 백제시대 고유 건축기법인 하앙식으로 지었다. 서까래 틀 윗부분에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하앙)를 하나 더 설치하는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더 길게 내밀도록 설계한 점이 눈에 띈다. 이 기법은 넓이만큼 햇볕을 가리고 비바람도 막는 효과가 크다.
남원예촌의 심당관에서는 안숙선 명창의 여정과 판소리의 역사를 만난다. 그는 판소리 ‘춘향가’ 등을 통해 득음의 경지를 보여줘 ‘판소리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며 2022년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됐다. 또 조갑녀 살풀이 명무관에서는 남원이 낳은 전설의 춤꾼 조갑녀 선생의 일생과 그가 남긴 남원살풀이, 남원승무, 남원검무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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