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10년 글쓰기 고민 클 때
그 시절 여공 친구 전화받고
내면 들어가 보고자 집필
좁은 벌집 살며 종일 일·공부
다들 열심히도 살았던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이 읽길 바라
여공의 우정·사랑·노동 넘어
인간 품격·죽음까지 담아낸 방
‘희재언니’ 내 문장서 불멸하길”
“나, ○○인데, 모르겠어?”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갑자기 호출당한 느낌이었다. 순간 당황했고, 그래서 아무런 대답이나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던 나른한 어느 날 오후, 전화 수신기에선 계속 친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함께 있었던 시절 잊은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고교 시절 3년간 함께 공부한 친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오히려 수신기를 드는 순간부터 전화선을 타고 어떤 시간, 기억들이 마구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그때까지 누구에게 고교 시절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통화를 마친 소설가 신경숙의 머릿속에선 친구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혹시 우리하고 함께 지냈던 그 시절을, 우리를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야…. 말은 기어이 가슴 속으로 들어와 마음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너는 우리하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더라….
그게 아닌데…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의 마음은 친구의 의심을 힘차게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입 밖으론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어떤 설명이나 해명도 내놓지 못했다. 친구야, 난 부끄러워하거나 그런 게 아니야….
지금 작가로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마침 첫 장편 ‘깊은 슬픔’을 발표한 직후로, 등단한 지 10년이 돼 작가의 삶을 되돌아볼 즈음이었다.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나 장편 ‘깊은 슬픔’을 쓰면서 뭔가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아쉬움도 있었고.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 더 들어가 보고 싶었다.
“너는 우리하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더라, 우리를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야, 라는 질문에 답변을 해줘야 될 것 같았습니다. 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그때 함께 있었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았고, 아울러 당시 작가로서 가장 큰 고민이었던 글쓰기에 대한 질문이어야 할 것 같았지요.”
작가 신경숙이 발표 30년 만에 유신 말기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닌 여성 노동자들의 분투와 작가로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교직시킨 장편소설 ‘외딴방’의 개정판을 펴냈다. 작품은 친구의 전화 직후부터 문학잡지에 네 차례 연재한 이듬해인 1995년 처음 발표됐다.
소설은 작가가 된 ‘나’가 어느 날 고교 친구의 전화를 받고 “열여섯에서 스물이 되기 전까지”, 즉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에서 보고 느꼈던 삶을 반추하면서 펼쳐진다. 구로공단 동남전기에 다니면서 산업체특별학급으로 영등포여고를 다녔던 기억과, 현재 작가로서의 글쓰기 고민이 교차하면서 잔잔하고도 거대한 공명을 일으킨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차창을 내다보았다. 멀리 공장 굴뚝들이 울뚝울뚝 솟아 있었다. 기차가 좀 천천히 달렸으면. 그곳에 불을 좀 밝혀주었으면. 창턱에 내려놓은 팔을 쳐다보았다. 기차의 진동에 팔이 이러저리 흔들렸다. 여기가 그곳이려니 생각하는 순간, 가슴속에서 백로 한 마리가 푸드득 깃질을 쳤다.”
신경숙은 왜 ‘외딴방’을 써야 했고, 30년 만에 다시 개정판을 내야 했을까. 그가 그린 외딴방은 도대체 무엇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가고 있을까. 신 작가를 지난 12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지금은 공장과 외딴방이 있던 구로공단은 예전의 모습을 상실했습니다.
“가끔 제가 살았던 가리봉동 근처를 가볼 때가 있는데, 지금은 알아볼 도리가 없이 완전히 변했더라고요. 작품을 쓰고 한 10여 년 동안 가보지 못했어요. 나중에 한 신문사 기자들과 갔던 기억이 있는데, 너무 달라져 당시 길을 찾지 못하겠더라고요. 이제는 소설 안에만 있는 풍경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벌집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다들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그곳 외딴방에서 저와 외사촌, 큰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놀랍지만, 그땐 다들 열심히 살았어요. 아침부터 밤이 될 때까지 일하고, 밥도 해 먹고, 그곳에서 웃는 일도 많았지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끼면서 자기 삶만 꾸려가는 게 아니라 적은 월급에도 시골로 보내고 동생 학비도 대고 그랬어요. 어떻게 살았지, 라고 생각하는 건 먼 훗날 그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죠. 인간이란 원래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의 약 20% 정도밖에 안 하고 산다고 하더라고요.”
―희재 언니를 비롯해 안향숙, 미서 등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특히 공을 들인 인물은 누구였나요.
“희재 언니는 당시 공단에서 일했던 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어떤 상징성을 갖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삶을 헤쳐 나가지 못한 선택을 하는 쪽으로 나오지만, 안향숙이나 미서, 외사촌 등의 삶이 응축돼 있지요.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들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제 문장 안에서 다시 살아나 불멸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노동소설이나 성장소설, 메타소설로 보는 등 여러 평가가 나오는데요.
“‘외딴방’이 영어로 번역 출간된 뒤에도 질문이 나오던데, 외딴방이 노동 하나만 지칭하는 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소설로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 어떤 예술가 소설로도 읽히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하루 종일 과자를 싸는 노동자 친구들과의 우정이나 사랑, 노동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자존심이나 품격, 심지어 죽음까지도 같이 들어 있는 방으로 읽혔으면 좋겠어요.”
1963년 정읍에서 태어난 신경숙은 1985년 중편소설 ‘겨울 우화’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깊은 슬픔’,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아버지에게 갔었어’ 등을 발표했고, 연작소설 ‘작별 곁에서’, 소설집 ‘겨울 우화’,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모르는 여인들’ 등을 출간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외딴방’은 프랑스의 비평가와 문학기자 들이 선정하는 리나페르쉬 상을, ‘엄마를 부탁해’는 ‘맨 아시아 문학상(Man Asian Literary Prize)’을 각각 수상했다.
그는 오전 3시에서 4시 사이에 일어난다. 예전에는 알람을 맞춰 놨지만, 지금은 몸이 알아서 일어나진다. 1층 서재로 내려간 뒤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요가의 호흡 몇 가지를 한다. 이어서 책을 읽기도 하고, 작품도 쓰기도.
―글을 쓸 때 루틴 같은 게 있는지요.
“특별한 루틴 같은 것은 없지만,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어떤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에 뭔가 계속 안 하던 일을 해요. 서랍 정리를 비롯해 청소도 하고. 어쩌면 글쓰기를 최대한 미루기 위한 연막술인지도 몰라요(웃음). 손도 많이 씻는 것 같고요.”
오전 8시까지 서재에 머무르다가 9시쯤 요가학원에 가서 요가를 한다. 집으로 돌아와선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오후에도 좀 여유 있게 보낸다. 책을 읽거나, 약속에 나가거나, 약속이 없으면 잠깐 낮잠도. 저녁을 먹고 쉬다가 일찍 잠자리로. 그리하여 다시 하루의 중심 새벽으로, 새벽 글쓰기로. 그곳에서 그는 ‘그해 여름’을 만나고, ‘열 손가락을 움직여 끊임없이 물질을 만들어내야 했던 친구’들의 손을 붙잡기도 하며, 옥상 위로 올라가선 희재 언니도….
“새벽. 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하나씩 사위고 있다. 사위는 별빛 아래, 옥상 난간에, 누군가 금방 날아갈 듯이 앉아 있다. 희재 언니다. 그녀가 새처럼 옥상 난간에 앉아 복숭아나무나 사과나무 대신 울뚝울뚝한 공장 굴뚝 사이로 날이 밝아오는 걸 보고 있다. 기름냄새 사이로도 새벽빛은 푸르다. 새벽 앞에선 세상의 모든 것이 부드럽고 찬란한 새눈 냄새를 풍긴다. 공장의 굴뚝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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