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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18역으로 비극의 기원을 재구성한 배우 전혜진의 ‘차력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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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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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잉태됐는가. 연극 ‘라이오스’는 고대 그리스 도시 테베에서 벌어진 신화적 사건의 진실 추적을 시도한다. 비극의 기원을 운명이 아닌 폭력과 욕망, 그리고 인간의 오만에서 찾아내는 작품이다.

 

연극 ‘라이오스’에서 계단형 무대 중앙에 선 전혜진의 모습을 라이브 캠이 실시간으로 포착해 거대한 스크린에 비추고 있다. 서로를 몰라보는 아버지와 아들, 왕과 왕자가 마주 보듯 겹쳐지는 ‘거울 구조’가 공연의 핵심 장면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국립극단 제공

광기와 폭력의 시대를 지나 왕권이 공백이 된 테베. ‘흙먼지 날리는 좁은 길’ 너머로 늙은 왕 라이오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카드모스 왕가의 마지막 생존자다. 어린 시절 숲에 버려져 간신히 살아남은 그를 테베 시민들은 다시 불러 왕으로 세운다. 귀족 가문 출신의 야심으로 가득한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왕비 자리를 꿰찬다. 권력의 정점에서 라이오스는 점점 오만해지고, 결국 자신의 과거가 만든 죄와 폭력이 다시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비극의 구조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주를 피해 보려 발버둥 치지만, 결국 자신이 버린 아들 오이디푸스와 거리에서 마주친다. “길을 비켜라” “너나 길을 비키라고” “너는...너는...혹시 너는...”

 

‘라이오스’는 국립극단이 2년에 걸쳐 선보이는 테베 왕가 연대기 ‘안트로폴리스 5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의 여신도들’이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처럼 원전이 있는 다른 작품과 달리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가 신화의 빈자리를 직접 메운 유일한 창작극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무대는 원전의 단단한 서사 대신,  ‘만약’이라는 가정법과 변주, 반복으로 구성된다. 테베 성문과 베를린의 케밥 가게, 인스타그램과 오토바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공간의 교란은 고대 테베의 비극이 오늘 도시의 파국과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상공에서 테베를 위협하는 스핑크스의 울음은 라이오스의 숨겨진 죄와 무의식, 그리고 인간 내부의 공포를 구현한다.

 

‘라이오스’의 주인공은 전혜진. 이 거대한 서사를 혼자서 끌고 가는 ‘연기 차력쇼’를 펼쳐 보인다. 라이오스·이오카스테·오이디푸스·크리시포스·펠롭스 같은 ‘네임드’ 인물은 물론, 테베의 노인·관료·담뱃가게 노파·목동 등 총 18역을 넘나든다. 1인극이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이처럼 서사·감정·시간·장소가 다층으로 겹친 극을 단 한 명이 수행하는 사례는 드물다. 10년 만의 연극 복귀작인데도 개막 공연부터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각 인물의 리듬과 호흡을 분리해내는 연기력은 놀랍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목소리의 질감 변화, 속도·호흡·시선의 전환 등 전혜진의 몸은 하나의 코러스이자 해설자이고, 동시에 무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시연자다. TV·영화로 워낙 익숙하지만 1999년 입단한 극단 차이무에서 연기력을 키운 배우답다. 송강호, 문성근, 유오성, 명계남, 강신일, 문소리, 이성민 등이 거쳐 간 연기파 배우의 산실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대학로 전지현’으로 이름 날렸던 배우다.

 

연극 ‘라이오스’의 파편과 잔해가 흩어진 계단 무대 위에서 주인공 라이오스 역을 맡은 전혜진이 실재와 영상이 겹쳐지는 장면을 통해 무너진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전혜진은 1인 18역으로  서사·감정·시간·장소가 다층으로 겹친 극을 홀로 이끌어 간다. 국립극단 제공

특히 하이라이트는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의 삼거리 장면이다. 김수정 연출은 라이브 캠과 뒤편 스크린을 활용해 이 장면을 ‘거울 구조’로 시각화한다. 전혜진이 관객을 등지고 서서 한 인물을 연기하면, 카메라에 비친 얼굴은 ‘다른 인물’로 보인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운명처럼 충돌하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오만과 두려움, 인간의 욕망이 서로에게 반사되어 폭발하는 비극의 순간이다. 절정의 순간이 오자 전혜진은 마이크까지 벗어던지고 육성으로 극장을 뒤흔든다.

 

‘라이오스’가 선보인 미장센도 인상적이다. 무대 전면에 구축한 계단과 그 끝에 놓여진 왕좌가 다양한 상황에 맞게 효율적으로 기능하며 영상·레이저 조명·거대한 얼굴 오브제가 인물의 심리와 서사를 증폭한다. 절제된 미학과 현대적 장치가 과잉을 피한 채 정확히 맞물리며 극적 효과를 배가했다. 다만 극 초반 배경 설명에 상당한 시간이 할애되면서 느슨해졌던 초반부와 작품 특성상 피할 수 없는 3인칭 해설의 반복은 호불호가 엇갈릴 수 있다. 

 

거대한 얼굴 조형물 사이에서 가면을 쓴 전혜진이 해설자 격인 테베의 노인을 열연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인간의 선택과 욕망이 어떻게 파국을 연쇄적으로 낳는지 보여주는 ‘라이오스’는 단순한 신화의 재현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신의 예언을 피해 갈 수 없나. 신이라는건 누가 만들어낸건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지금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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