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천천히 서핑하고 있던 그의 눈길이 한 영상에 멈춰 섰다. 뉴욕의 한인 홈리스와 이들을 위한 노숙자 쉼터를 다룬 한국 다큐멘터리였다. 영어를 말하는 한인 홈리스가 많다는 것도 충격적이었고, 이들이 대체로 약물 중독자였다는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뉴욕의 압도적인 화려함과, 그 뒷골목의 노숙자라니. 이민자 마이너리티에, 약물 중독자 홈리스라는 모순이 중첩되면서 그들의 삶이 서글퍼 보였다. 4, 5년 전, 소설가 반수연은 이 이야기를 언젠가 소설로 쓰리라고 생각했다.
뉴욕 이스트리버가 마주 보이는 윌리엄스버그 해안에는 과거 큰 설탕 공장이 있었다. 근처에 아들이 살기에, 그는 자주 그곳을 산책했다. 설탕공장이 있던 곳은 지금은 월세 천만 원이 넘는 고가 오피스가 즐비한 신흥 주거지가 됐다. 공장에 있던 의자는 근처 공원에 소품으로 비치돼 있었다. 설탕 공장 노동자들이 일구어 놓은 유산을 자기 것인 냥 소비하는 모습이라니. 그런데 그곳에서 몇 블록만 가면 홈리스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 한인 노숙자 쉼터와 설탕 공장에 있던 곳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단편 소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가 그에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는 동두천 기지촌에서 살다가 남편 조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노년의 홈리스 여성 애나의 이야기다. 노숙자 쉼터에서 밥을 해주던 애나는 어느 날 쉼터 기부자 가운데 한 명인 김 교수의 자립을 도와주는 일을 맡게 된다. 한글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애나는 김 교수를 돌보면서 영어를 뜨문뜨문 연습하고 빠진 치아를 새로 해 넣기로 하면서 문득 지친 삶 속에서 잊고 있던 욕망을 꿈꾼다.
“교수님, 오늘 지는 틀니를 끼우러 갈 끼라예. 아래위 다 틀니로 해넣기로 했다꼬 말씀드릿지예. 이가 몇 개 없으니까 오히려 치료가 더 쉽더라꼬예. 애나가 인자 겁나 이뻐지낌미더. 그라마 지랑 커피 한잔 잡수로 가입시다. 지가 교수님 커피 한잔 사드릴라꼬예. 요기 앞에 과테말라 커피집에 찰리라는 아가 있어예. 그아는 눈이 똥그랗고 머리가 굽슬굽슬한 기 참말로 이삐게 생겼어예. 교수님, 와 말이 없노. 잠미까?”(35쪽)
부조리한 환경과 불우한 삶 앞에 쉽게 절망하는 오늘, 배반의 삶에도 인간 보편의 욕망을 꺾지 않고 키워나가는 고령 이민자 애나야말로 어쩌면 절망적인 21세기에 소망하는 새 인간형인지도 모른다.
서른 너머부터 캐나다에서 거주 중인 한인 작가 반수연이 욕망하는 ‘불온한 경계인’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명력 있게 그려낸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를 비롯해 7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파트타임 여행자』(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파트타임 여행자’는 아무리 오래 여행하더라도 집을 남겨두고 온 사람을 가리키고, 돌아갈 집조차 없는 경우 ‘풀타임 여행자’라 부른다.
이번 소설집에는 동두천 기지촌 출신 이민 여성의 브루클린 분투기인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를 비롯해 표제작 「파트타임 여행자」, 2024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조각들」 등 2021년부터 4년간 발표한 작가의 단편들이 담겨 있다.
이민자 부녀의 마지막 로드 트립, 인연들을 잃고 홀로 미 국립공원 일주를 떠난 여성의 트레일 여행기, 이국의 양로원에서 새 사랑을 만난 노년의 여성.... 각 작품에는 작가의 여로적 삶과 경험을 반영하듯 이민자와 경계인들의 서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가히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 미셸 자우너의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처럼 장르와 국경을 막론하고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경계 위의 한인들 이야기의 확장이자 심화가 아닐 수 없다.
반 작가는 왜 이민자를 비롯해 경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만 했을까. 그가 그린 이민자와 경계인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갈급한 질문들을 앞에 놓고, 잠시 방한한 반 작가와 지난달 17일 서울 용산 사옥에서 마주 앉았다.
―소설집을 여는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의 애나는 욕망에 당당한 매력적인 노인 이민자이다.
“제가 저 자신을 너무 투사했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페르소나라는 얘기인가) 네. 애나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이렇게 매력적인 노숙자가 있을까) 있더라. 노숙자를 한 개인으로 봤을 때는, 그들에게도 욕망이 있고, 서사도 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사회가 밀어붙인 것들도 있었다. 한 발자국씩 뒷걸음질을 치고 보니 어느 순간 오갈 데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이 소설을 쓰게 된 중요한 계기 가운데 또 하나는 군인을 따라 미국에 가서 살다가 사라져버린 여자들이다. 몇 십 년이 지나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제대로 풀리지 않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옛날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하면 다른 행성에 간 것처럼 소식이 끊기기 쉬운 시절이었는데, 미국으로 가서 사라진다 한들 아무도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다.”
―반면 김 교수는 기부자이고 시도 이야기하는 지적인 사람이지만 한편으론 위선적인 모습도 엿보이는데, 우리는 김 교수를 어떻게 봐야 할까.
“김 교수는 이민사회에서 보면 모든 걸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됐고 자식도 잘 키웠지만, 여전히 어떠한 갈증이 있는 인물이다. 책을 좋아하고, 많은 지식을 습득했지만, 아는 척할 공간과 대상이 없는 인물이다. 애나와 어떤 결핍이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애나가 틀니를 하는 건 어떤 의미인가.
“빈곤층이나 사회 소외계층에 제일 취약한 부문 가운데 하나가 치아다. 실제 노숙자 쉼터 등을 조사해보면, 치아가 성한 사람이 거의 없더라. 중요한 것을 알지만, 없어도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니 제일 마지막에 돌보는 것 같다. 이런 치아가 주는 상징을 생각했다.(실제 이빨과 관련한 경험이 있는지) 치과 진료비가 너무 비싸서 치아가 저절로 빠질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캐나다나 미국에선 치과 의료보험이 안 돼 이민자들한테는 큰일이다. 치과 간다고 한국으로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가 이민자 사회 내부의 계급이나 젠더 차이를 조명했다면, 2024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조각들」은 이민자 부녀의 세대 차이와, 그럼에도 함께 건너야 할 수밖에 없는 공동의 아픔을 세밀히 묘파하는 작품이다. 이민자 부녀는 딸 지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마지막 로드 트립을 떠나면서 서로 어떻게 세상에 살아왔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그건 자유에 관한 거야. 내게 어마어마한 자유로움을 준다고.’ 왜 몸을 학대하느냐고 물었을 때 지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는 말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너의 문신이 늘어날 때마다 내가 벌 받는 기분이 든다는 말은 끝내 참지 못했다. ‘자유가 아니라 너는, 사람들의 눈에 구속되는 거야. 네가 얼마나 공격적으로 보일지 생각해봤어?’ ‘상관없어. 어차피 사람들은 약자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걸 공격이라고 여기니까.’ ‘네가 이상한 애로 보일까봐 너무 걱정돼.’ ‘아빠가 그러니까 내가 남의 눈치나 보는 사람으로 자랐어. 그게 너무 싫다고.’”(60쪽)
―이민자들의 세대 문제를 묘파한 「조각들」은 어떻게 나왔는가.
“이십대 딸이 미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취업해 이사를 가던 2023년 봄, 이른 새벽에 짐을 싣고 샌프란시스코까지 함께 로드 트립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한국의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 가듯 생각하고 갔다. 미 국경까지 차로 10분 거리의 캐나다 밴쿠버에서 태어났고, 미국과 이질적인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고 키운 딸이었다. 근데, 막상 가보니, 딸 역시 이민자였다. 예를 들면, 미국과 캐나다는 추수 감사절이 약간 다른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캐나다에서 취업 온 친구들끼리 모여 추수 감사절 파티를 하더라. 제가 이민 와서 추석이면 친구들과 모여 빈대떡을 붙여먹던 생각이 나더라. 이민의 경험을 느끼지 말라고 열심히 키웠는데, 결국 이렇게 된 게 아이러니하고 이상했다. 여기에 교육청 목수인 남편이 경험한 논바이너리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수자 소통이나 연대를 느껴 쓰게 된 것 같다.”
―독자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는 얼마간의 공간이나 틈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고 포용하기보다는 배타적이고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어떤 조형물 안에 사각형 고체를 넣어놨을 때처럼 모서리마다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결국 거기에 스며들게 된다. 따라서 과정 중에 너무 선입견이나 단정 짓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떤 마음의 자세를 이야기한 것이다.(사회학에서 말하는 에포케, 일종의 판단중지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네. 우리는 어떤 것을 받아들일 때 확정 편향을 익숙하다. 나빠, 하면 나쁜 것을 찾기 시작하고 나빠를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고 싶어 한다. 근데 나빠, 이전에 몰라, 에서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표제작 「파트타임 여행자」는 인연들을 잃고 홀로 미국 국립공원 일주를 떠난 여성 ‘민’의 트레일 여행기다. 가족 제이크는 물론, 인연들이 곁을 떠난 뒤 홀로 국립공원들로 여행을 떠난 민은 삶이 곧 상실의 과정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을 직면할 때 비로소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진실에 닿게 된다.
“민은 쪼그려앉아 웅덩이에 비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민은 웅덩이 속 얼굴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웅덩이 속의 얼굴도 웃었다. 집을 떠나온 후에야 뒤늦게 민은 왜 자신이 그토록 떠나고 싶었는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현실을 견고 싶어 꾀를 낸 건가 싶기도 했지만 뚜렷한 답은 얻어지지 않았다.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106쪽)
―「파트타임 여행자」에선 아름답고 강한 단독자를 열망하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제가 로드 트립을 좋아한 이유는 일단 운전을 좋아한다. 남편과 같이 여행을 가도 제가 스무 시간, 남편이 두 시간, 10대 1의 법칙으로 운전한다. 게다가 제가 남편에게 운전을 가르쳐 ‘사수’라는 감각도 있다(웃음). 로드 트립은 사실 돈이 제일 안 드는 여행이기에 많이 했던 것도 있다. ‘한국 분이냐.’ 2018년쯤 미국 국립공원 캠핑장에서 가족끼리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여성이 다가왔다. 손수건 같은 것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고, 국적을 가늠할 수 없는 동양인의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니 6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민의 모델이 될 만한 여자였다. 와인도 한 잔 따라주셨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은퇴를 하고 40만 킬로를 뛴 자동차를 몰고 혼자 7개월 동안 집을 돌아가지 않고 여행하고 있다고 하더라. 소설에선 남자 친구가 오지 않지만, 실제론 남자친구는 왔다. 이 사랑에 정착해야 하나, 아니면 오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떠나야 되나. 갈등 속에 있는 여성이었는데, 갈등을 하면서도 여행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충격적이었고, 멋있어 보였다.”
「춤을 춰도 될까요」는 이국의 양로원에서 새 사랑을 만난 여성의 자주적이고 용기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 딸 앨런과 양로원의 서 여사는 목사의 아내였던 ‘나’의 연애를 터부시하고 막아서려 하지만, “이해받지 않겠다고 이를 앙당”물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라고, 지켜내야 할 존엄이라고” 다짐하며 인생 2막을 열어젖히려 시도한다.
―작품 속의 ‘나’ 역시 독립적이면서도 욕망에 당당한 놀라운 노인인데.
“10년 전쯤, 친구와 캐나다 호스피스 병동을 간 적이 있었다. 이때 만난 사람은 살짝 치매기가 있던 80대 여성이었다. 죽음을 앞둔 외롭고 불쌍한 한국 할머니를 상상하고 갔는데, 계속 남자 얘기를 하더라. 저 자식이 어젯밤에도 내 방 문을 두드렸다, 저 놈 때문에 귀찮아서 못 살겠다고 얘기하시는데, 웃기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더라. 친구는 곧 돌아가실 서양 커플이 결혼한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왜 결혼까지 할까, 부모가 이렇게 하면 골치 아프지 않을까. 서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차츰 노인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의 정목수에 대한 사랑을 막아서는 딸 앨런과, 죽음을 앞두고서라도 결혼을 감행하는 미셸의 모습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자식들은 좀 이기적이다. 자식들은 부모가 그냥 조용히 방에 계시다가 어느 날 애 먹이지 않고 돌아가셨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식의 욕망이다. 딸 앨런은 어떤 좌절이고, 반대로 미셸은 물주지 않아 사그러든, 용감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에서 보면 판타지다. 서양 노인들이 독립적일 수 있는 것은 부양이 가족 책임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또 양로원 같은 곳도 다 1인실로, 나름 인격을 존중하기에 가능한 것 같다.”
단편 「프레살레」는 남편이 죽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들 윤수를 두고 막막한 심정 속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파리 여행에 합류한 여성 수정의 이야기다. 과시적인 친구 ‘홍’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친구 윤희와 정아, 민지 속에서 고민하다가 부조리한 일행이 아닌 고독한 단독자를 택하게 된다.
―「프레살레」는 어떻게 탄생했는지.
“가끔 유럽으로 여행가면 여행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도둑맞지 않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친구가 가방 잃어버린 이야기를 듣고 저도 비슷한 경험을 많이 들어서 소설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취향이라는 것도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언어인지도 생각해봤다. 어떤 커뮤니티에도 ‘홍’ 같은 인물이 있는데, 믿을 만한 윤희 같은 친구들이 그 부당함에 영합하는 것을 보게 되기도 한다. 소설을 통해 인생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들은 대부분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어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내게 왜? 하는 질문에서 벗어났으면 좋겠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얘기를 꼭 해주고 싶었다.”
―배려심 있던 윤희의 행동은 수정에게 의외의 모습인데.
“드러난 윤희의 모습은 아무 생각이 없는 애처럼 ‘홍’에게 동조하지만, 윤희도 자신의 내면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윤희 입장에선 수정이야말로 윤희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 예민하고 까탈스럽게 구는 수정의 모습이야말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윤희 자신의 내면일 수 있고, 내면을 자꾸 자극하는 수정이 싫은 것이다. 부당하니 안 부당하니 이런 얘기하지 말고, 돈 들이고 시간 들여 왔으니 ‘홍’하고 호흡 잘 맞춰 여행을 마치자고 윤희는 계속 수정을 설득하고 싶은 것이다.(반 작가는 삶에서 수정이형인가, 아니면 윤희형인가) 저는 수정인 것 같다. 부당한 것에 쉽게 동조하는 것에 검열이 좀 있는 사람이고, 예민함이 싫은데, 잘 안 버려지더라. 아마 수정이처럼 행동했을 것 같다.(수정이 스타일이라면 삶이 늘 긴장되고 불편할 텐데) 저도 어디서 까탈스럽다는 얘기를 듣는 스타일은 아니다. 수정이 되고 싶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윤희 스타일이 성숙하고 어른스러움으로 인정받으니까 실제 윤희일 수도 있겠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수정이처럼 복잡한 인간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윤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가 좀 둥글둥글하고 친구도 많고(웃음).”
―두 번째 소설집인데, 이번 작품집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 번째 소설집 『통영』보다 조금 성장한 것 같다. 첫 번째 소설집은 자전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지만, 어떤 문장도 자전적이지 않은 건 없다. 이번 소설집을 통해 세상을 조금 더 들여다본 것 같다. 노인과 이민이라는 두 개 마이너리티를 늘 생각한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힘든데, 두 개가 겹쳤을 때는 고단함이 증폭된다. 소설을 통틀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생의 보편성이었던 것 같다.(앞으로 하게 될 문학의 변곡점이 될까) 어떻게 보면 모든 이민자들이 파트타임 여행자일 수 있다. 왜냐하면, 밖에 살고 있지만 늘 생각한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언제쯤 돌아갈까, 어쨌든 마지막에는 돌아가면 돼, 하고. 디아스포라라는 감정이 어떤 한정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정서이다. ‘나’라는 당대성, ‘지금’이라는 당대성을 얘기할 수 있는 소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푸른 남해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통영이 너무 좋았지만, 한편으로 너무 싫었다. 서울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통영으로 내려온 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건축하는 남편을 만나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그였지만.
“소설집 『통영』에도 나오지만, 제 운명을 마치 미리 규정지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곱 살 때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게 돼 ‘시장통 막내딸’이 됐는데, 저렇게 자란 애는 저렇게 밖에 살 수 없어, 라는 사회적 낙인 같은 게 있는 것 같았어요. 통영은 너무 좋은데, 멀리 떠나고 싶었죠. 그래서 무작정 캐나다로 갔는데, 캐나다라는 목적지보다는 통영을 떠난다는 의미가 훨씬 컸었어요.”
IMF(국제통화기금) 체제가 한창이던 1998년, 서른셋의 반수연은 남편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갔다. 이후 삶은 마치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날아오는 변화구 같은 파란만장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웠고, 안 되겠다 싶어 있는 돈을 다 모아 공장 지대에 식당을 열었다. 남편은 요리를 하고, 그는 홀에서 손님을 맞았다.
“손님이 너무 오지 않는 거예요. 식당을 판 사람은 2주 만에 동쪽 끝으로 이사를 가서, 속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손님이 너무 안 오니까 정말 죽고 싶더라고요. 아이들은 아직 2살, 7살인데, 어떻게 살아가지. 바쁘고, 힘들게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어요. 돈을 못 버는 것보다 더 괴로운 건,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거였어요. 기다린다는 게 너무 힘들었죠. 저기서부터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데, 오나 하고 심장이 쿵딱쿵딱 뛰는데, 그냥 지나치면 배신감 같은 감정이.... 지나가는 사람이 저에게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저 혼자 너무 괴롭더라고요. 마치 뺨을 한 대 맞은 것처럼.”
기다림을 견디기 위해, 그는 책을 다시 들었다. 가져간 책이 한정돼 있어 책을 반복해 읽게 됐다. 이때 김주영의 장편소설 『천둥소리』도 읽게 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소설 속 길녀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순간 생각했다. 길녀도 사는데, 나는 왜 못 살아. 만약 지금 죽는다면 무엇이 가장 후회스러울까. 그래, 글을, 소설을 써야겠다. 어릴 때 활자 중독자라고 불릴 만큼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소설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반수연에게 소설가의 씨가 뿌려지던 순간이었다.
마침 온라인으로 합평을 해주는 모임이 있었다. 『머나먼 쏭바강』을 쓴 박영환 작가가 운영하는 창작교실이었다. 2002년, 그는 창작교실에서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 1965년 통영에서 태어난 반수연은 서른아홉 살이던 2005년 단편소설 「메모리얼 가든」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한 동안 청탁도 없고, 기억하는 이도 없어 서서히 잊혀져갔다. 같이 글을 쓰는 문우도 없었다. 생활은 매일 헤쳐나가야 할 것이 산더미인 전쟁터였다. 식당이 망한 뒤, 하숙을 하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남편이 목수가 되면서 생활은 조금씩 안정돼 갔다. 아이들까지 모두 성장하자 더 이상 먹고 사느라, 자식 키우느라, 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재외동포문학상이라도 보내볼까. 2014년,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등단 때보다 더 힘들게 썼다. 오전 9시부터 도서관에 앉아 무작정 글을 썼다. 쓸 게 없으면 유행가 가사를 썼고, 저녁 요리법을 쓰기도 했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네 번이나 수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등단 16년 만인 2021년 소설집 『통영』을 발표했고, 산문집 『나는 바다를 닮아서』도 펴냈다.
―소설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인지.
“소설을 쓸 때 어떤 결론까지 생각하고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보통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것 같다. 멋 내지 말고 진솔하게 쓰자, 인물과 상황, 쓰고 싶은 마음을 끈질기게 추적해 보자, 내가 먼저 이해해 보자, 는 생각을 한다. 이런 마음이 크다.”
―작가로서 비전이나 포부은.
“자신의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이거 읽으니까 그때 생각이 났어, 하는 얘기를 제일 듣기 좋아한다. 어느 한 때의 자신과 한 번 부둥켜앉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그게 작가로서의 포부다. 흔한 말로 위안일 수도 있고,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런 위안을 통해 희망이라는 게 생기지 않을까.(글로써 마음을, 사람을 환기시키고 싶다는 의미인데) 소설이 예술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얼마나 성취를 했느냐를 떠나서, 어떤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전 7, 8시쯤 일어나 먼저 커피부터 간다. 이미 남편은 출근한 상태. 한 두 시간 정도 정성스럽게 아침 식사를 준비해 먹은 뒤, 산책을 간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숲에서 숲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10킬로 정도 걷기도. 산책을 다녀와서 씻고 점심을 먹는다.
오후 4시쯤 남편이 퇴근하면 저녁을 만들어 함께 먹고 영화를 보거나 각자 책을 읽으며 보낸다. 마치 절간 같은 생활. 남편은 일찍 자고, 그는 밤 12시에 눈을 감는다. 침대 옆에는 한국에서 사온 책들이 주로 올라와 있다. 눈을 감기 직전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어려운 책을 편다.
글을 쓰는 시간은 주로 오후. 카페에 갈 때도 있고 집에서 쓸 때도 있지만, 약간의 강제를 위해 카페에서 쓸 때가 더 많다. 먼저 책상 위를 정리한 뒤, 노트북을 켜고 뉴스나 페이스북도 들어간 뒤, 한글 파일을 연다. 하루 서너 시간 정도 글을 쓴다. 멋 내지 않고, 진솔하게, 무엇보다 지치지 않고. 그리하여 21세기 ‘노인 혁명’의 깃발을 올리는 불온한 이민자 노인을 탄생시키고야 만다.
“나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산 사람이 할 법한 것들을 하고 싶다. 춤추고, 노래 부르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만지며 살고 싶다. 연애소설을 읽으며 불온한 상상을 하고, 지나갔으나 지나가지 않은 시간을 떠나보내고, 떠나보내며 울어도 보고 싶다. 욕망했으나 저절로 말라비틀어져버린 것들을 한번쯤은 매만지고 싶다. 그게 도대체 누구에게 해를 가하는 일인가.”(「춤을 춰도 될까요」,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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