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정상에서 본 ‘열도 명산 100좌’의 매력

입력 : 2025-11-08 06:00:00 수정 : 2025-11-06 18:44:13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인쇄 메일 url 공유 - +

日 소설가, 낙향 후 ‘산의 문학자’로 변신
역사·품격 넘치는 해발 1500m 명산 완등
최고봉 후지산 ‘日 제일·대중의 산’ 칭호
석양 비친 하쿠산 ‘더 없을 아름다움’ 극찬
출간 60년 지났지만 ‘등산 바이블’로 각광

일본백명산/ 후카다 규야/ 강승혁 옮김/ 글항아리/ 6만5000원

 

“위대한 일은 사람과 산이 만났을 때 이루어진다. 어수선한 길바닥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윌리엄 블레이크는 ‘격언 시편’에서 등산을 위대하다고 노래했다. 그렇다면 일본 소설가 후카다 규야(深田久彌·1903∼1971)가 산에서 이룬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계 등산인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명저로 꼽히는 후카다 규야의 ‘일본백명산’ 한국어판이 반세기 만에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후지산, 미야노우라다케, 하쿠산의 전경. 글항아리 제공

후카다는 젊은 시절 오랜 기간 동거했다가 결혼한 시인 기타바타케 야호와 1947년 이혼했고, 야호는 이에 후카다가 자신의 글을 표절해 작품을 발표했다고 폭로했다. 야호와 동거 직후부터 소설을 발표해 호평을 받아 대학과 출판사 모두 그만두고 글쓰기만 전념해온 그는, 야호의 폭로로 작가로서의 생명이 사실상 끝났다.

그는 대신 결혼피로연에서 만났다가 연정이 생긴 첫사랑 고바 시게코와 재혼한 뒤 문단을 떠나 조용히 유자와에 낙향했다. 이때 그의 소유는 고작 열 몇 꾸러미의 짐이 전부였다. 이때부터 그는 문단의 평판이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산의 문학자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후카다 규야/강승혁 옮김/글항아리/6만5000원

특히 이제야말로 주목할 만한 산에 모두 오른 뒤 100좌의 일본 명산을 선정하고 소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생각은 이미 전쟁 전부터 해왔고, 한동안 산악잡지에 ‘일본백명산’이라는 제목으로 25좌까지 연재해왔던 그였다. 연재는 잡지가 폐간되면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산에 오르고 또 올랐다. 수많은 시간을 산에서 보냈고, 산 위에서 거친 음식을 먹으며 한뎃잠을 잤다. 하산해선 산에 대한 글을 썼고, 틈틈이 히말라야 관련 문헌을 번역 소개했다. 그리고 1959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60세가 되는 1963년 글을 마무리 짓고, 1964년 여름 ‘일본백명산’ 초판을 출간했다. 소설가 후카다의 변신 결과이자 오랜 산생활의 결과물이었다.

세계 등산인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명저로 꼽히는 후카다의 ‘일본백명산’의 한국어판이 무려 반세기 만에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마치 선물 같은 책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일본에서 명산을 선정하는 발상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후카다의 책은 산을 다룬 이전의 책들과 달랐다. 그는 기슭에서 산을 보지 않고 정상까지 모두 오른 뒤에야 글을 썼다. 일부는 몇 번을 물러났다가 다시 오르기도. 그래서 그는 후기에 이렇게 쓸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꼽았던 백 곳의 명산은 전부 내가 그 정상에 섰다. 백을 골라야 하는 이상, 그 몇 배의 산에 올라봐야만 했다. 어느 정도 수의 산에 올랐는지 세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산에 오르는 일은 소년 시절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도록 거의 끊인 적이 없었기에, 여러 산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자신이 있다.”

후카다는 “내 눈은 신처럼 공평하지는 않다”고 전제하면서도 산의 품격, 산의 역사, 산의 개성이라는 세 기준으로 삼아 1500m 이상의 산 가운데 일본 명산 100좌를 선정했다. 그는 일본 백명산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70% 정도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나머지 30%는 고심이 컸다고 회고했다.

“레분섬에서 해 질 무렵 바라보았던 리시리다케의 아름답고 강렬한 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산은 바다를 가르고 서 있었다. 리시리후지라고 부르지만, 가지런한 형태라기보다 오히려 날카로운 바위가 우뚝 솟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바위는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다를 가르고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해발 1721m의 홋카이도 리시리다케를 소개하는 것으로 책을 연다. 홋카이도 9좌에서 시작한 책은 도호쿠, 기타칸토, 북 알프스, 미나미칸토, 중앙 알프스, 호쿠리쿠와 시코쿠의 산들을 거쳐서 규슈의 산에 이른다.

특히 해발 3776m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후지산 대목에선 “일본 제일의 산”이라고 부르면서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이 한 번쯤 후지산 등산을 꿈꾼다며 “민중적인 산” “대중의 산”이라고 규정한다.

책은 해발 1936m의 규슈 가고시마현의 미야노우라다케를 마지막으로 일본 백명산의 소개를 모두 마친다. 미야노우라다케의 정상을 오른 순간을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밝아왔던 이튿날 아침은 또다시 쾌청. 야쿠시마조릿대와 만병초가 뒤섞인 한가로운 길을 올라 미야노우라다케의 정상에 섰다. 정상 가까이에는 30㎝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내다보이는 것은 모두 산이고 그 산 너머는 바다이다. 지금까지 어딘가의 깊은 산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정상에서 에워싼 바다를 바라보고 나니, 비로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야노우라다케는 해안의 어느 마을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꼭대기에서 보이는 것은 산과 바다뿐이다.”

후카다는 나중에 일본등산협회 부회장이 됐고,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며 실크로드 산들을 탐험하기도 했다. 그의 죽음조차 비범했으니, 1971년 3월 야마나시현 해발 1704m의 지가다케(茅ヶ岳) 정상 부근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이다.

책 ‘일본백명산’은 지금도 많은 일본 등산가가 최고의 소장품으로 여긴다. 일본에 100좌의 명산이 있는 한, 사람들이 그곳으로 떠나는 한, 이 책은 계속 읽힐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지금도 산을 걷고 있는 후카다의 모습이 어른거릴지도.

그러니까, 1903년 이시카와현 가가(加賀)시에서 종이인쇄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후카다는 12세 때 많은 초·중학교 소풍코스였던 가가시 남서부에 위치한 해발 942m의 후지사가가다케(富士·ヶ岳)에 오른 게 계기가 돼 등산에 흥미를 갖게 됐다. 도쿄대 교양학부에 입학한 뒤 학교 등산부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이쿠 필명조차 ‘구산(九山)’이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근심스러운 듯 묻자, 소년 후카다는 아무런 저어함이 없이 대답했다. “중이나 거지요.” 소년은 그때 아마 집 이층에서도, 소학교 교문에서도, 붕어 낚시하는 강변에서도, 그러니까 고향 어디에서나 보이는 하쿠산(白山)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해 질 녘, 바다로 가라앉는 태양의 은은하게 남은 노을을 받아 하쿠산이 장밋빛으로 물드는 한때는 다시없을 아름다움이었다. 금세 엷은 쥐색으로 저물어 가기까지의 잠깐 동안의 미묘한 색채의 추이는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피니언

포토

수지, 발레 삼매경…완벽한 180도 다리 찢기
  • 수지, 발레 삼매경…완벽한 180도 다리 찢기
  • 47세 하지원 뉴욕서 여유롭게…동안 미모 과시
  • 54세 고현정, 여대생 미모…압도적 청순미
  • 전종서 '순백의 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