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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신 장벽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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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27 23:03:47 수정 : 2025-10-27 23: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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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척·노동의 증언인 고대 방벽
본래의 기능 잃고 관광 자원화
최근 난민 등 명분 또 쌓아 올려
분열·대립 극단적 결과 아쉬움

미드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왕좌의 게임’에는 거대한 얼음 장벽이 등장한다. 장벽 너머에는 다른 자(The Other)가 산다. 인간이 아닌 이질적인 것, 이름 붙이기조차 꺼려지는 자들이 사는 야만의 땅이다. 드라마는 이 미지의 공포를 통해 내내 서늘한 긴장을 유지한다.

장벽의 모티브는 잉글랜드 북부에 실제로 남아 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다. 2천년 전 브리타니아섬을 점령한 로마인이 북방 세력을 막기 위해 섬을 가로질러 세웠다. 지금은 잡풀에 뒤덮인 채 지나는 역사 덕후들의 발길을 붙잡을 뿐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두려움과 배척, 고된 노동의 증언인 고대의 방벽들은 이제 본래의 기능을 잃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가로막았던 자리엔 도로와 철길이 들어섰고,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중세의 성벽들 또한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관광자원이 된 지 오래다.

1990년 7월, 베를린에서 열린 ‘더 월(The Wall)’ 콘서트는 한 시대의 벽을 허문 기념비적 이벤트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해 열린 이 공연에는 핑크 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스를 주축으로 스콜피언스, 시네이드 오코너, 브라이언 애덤스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20만명의 관중이 몰렸고, 전 세계 수억 명이 TV를 통해 현장을 지켜봤다. 무대 뒤 벽이 무너지는 피날레는 냉전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가장 극적인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차츰 세상의 모든 장벽이 허물어질 거라 믿었다. 하드리아누스 돌벽이 부서져 발길에 차이듯, 입장권 한 장이면 누구나 중세의 성벽을 통과하듯, 머지않아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에서도 ‘더 월 콘서트’ 같은 축제가 열릴 거라 생각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가 노랫말이 아닌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실제로 1991년 소련 붕괴, 1993년 유럽연합(EU) 출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설립이 이어지며 낙관론이 한껏 부풀던 때였다. 철의 장막이 걷히고 유럽 국경은 희미해졌다. 자유 무역의 물길도 열렸다. ‘세계화’와 ‘지구촌’이란 말이 유행하던, ‘월드 와이드 웹’이 세상을 연결하기 시작하던 시절의 기억이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21세기 초입부터 테러, 난민, 안보 위기 등 균열의 조짐이 드러났다. 2016년, 대선 후보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국경 장벽을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만 해도 선거용 구호쯤으로 여긴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트럼프 집권 후, 강철 기둥이 줄지은 대규모 장벽이 실제로 국경을 따라 세워지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살인적인 폭염 속에 이 강철 장벽 위로 검은색 페인트가 칠해졌다. 태양에 노출된 표면을 최대한 뜨겁게 만들어 불법 입국자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겠다는 조치다. 국경을 막는 물리적 장벽이 견고해지는 동안, 비물리적 장벽은 더 거대한 위세로 솟아오르고 있다. 지난달 미국은 자국민 고용 확대를 명분으로 전문직 비자(H-1B) 수수료를 100배 인상했다. 인적 교류를 가로막는 장벽이다.

경제적 장벽은 또 어떠한가. 보호무역과 관세, 기술 규제의 벽이 세계화의 이상을 밀어내며 코앞의 위기로 닥쳐왔다. 강대국들의 자국 중심 경제 블록화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큰 부담이다. 곧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이 거대한 장벽을 넘어설 실질적 해법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문제는 국가 간 장벽이 높아질수록 내부가 결속되기는커녕 동시에 내부의 분열 또한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공개된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의 한 장면을 보자. 내전으로 갈가리 찢긴 미국. 총구를 겨누는 상대에게 주인공이 다급히 외친다. “우리도 미국인이에요.” 하지만 되돌아온 질문은 싸늘하다. “어느 쪽 미국인?(What kind of American are you?)”

이 장면이 섬뜩한 건, 정치적 극단으로 치닫는 미국 사회의 현실, 나아가 분열과 대립이 심화된 오늘날 세계의 단면을 그대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권도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추석을 앞두고 여야 청년 의원들이 화합과 기부를 겸한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준비했다가 강성 지지층의 맹비난에 휩싸였다. 결국 해당 의원이 “지금은 단일대오를 이뤄 싸워야 할 때”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악수는 사람하고 하는 것”이라며 야당과의 대화를 거부한 여당 대표의 발언에 이르면, 협치는커녕 증오와 절멸의 투쟁만 남은 정치 현실이 절망스럽다.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세운 고대인에게 벽 너머는 알 수 없기에 공포로 가득한 미지의 땅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벽 너머는 어떠한가. 알 수 없는 곳인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곳인가. 이념으로, 지역으로, 세대와 계층으로, 심지어 성별로까지 갈라져 날마다 차갑고 육중한 벽을 쌓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참담하다. 내부의 벽조차 허물지 못하면서 이 거친 신(新) 장벽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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