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 속 깨달음으로 민족의 길을 열다
우리 민족 시문학사에 불멸의 고전으로 남은 ‘님의 침묵’이 내년이면 출간 100주년을 맞는다. 동국대학교는 지난 10월 11일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에서 ‘님의 침묵’ 출간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을 갖고 2026년을 기점으로 학술대회·전시·공연·청년축제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시집의 저자는 일제 강점기 조국 상실의 비애 속에서 정신의 독립과 자유의 노래를 남긴 시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이다. 그는 근대사의 격랑 속에 태어나 현대사의 새벽을 연 시대의 스승이었고, 근대 한국 정신사에서 한 봉우리처럼 우뚝 선 인물이었다. 서산대사 휴정, 용성 스님과 함께 ‘민족불교의 3대 정신적 계승자’로 불린다.
 
 
            민족과 불교를 깨우친 사상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일찍이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 무력한 자아의 한계를 절감했다. ‘인생은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하던 그는 설악산 백담사(百潭寺)로 들어가 출가했다. 수행과 정진의 세월 속에서 그는 스승 김연곡의 인도로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과 ‘영환지략(瀛環之略)’을 읽고 세계정세와 서양사상에 눈을 떴다.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불씨를 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 일본의 신문물을 탐구하며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완성했다. 이 책은 한용운 사상의 출발점이자, 조선 불교의 근대적 개혁과 자주적 부흥을 촉구한 정신 선언문이었다. 그는 식민지 불교의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며, 불교가 민족의 정신적 주체로 다시 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찾아 격려하며, 나라 잃은 백성의 통한을 온몸으로 느꼈다. 일제가 종교계까지 장악하려 하자 그는 임제종 운동을 통해 조선 선불교의 본래 정신 회복을 꾀했다. ‘한문독본’(1912), ‘불교대전’(1914), ‘정선강의채근담’(1917) 등의 저작에도 관여하며, 불교계와 청년층의 민족계몽운동을 이끌었다.
 
 
            1917년, 39세의 한용운은 백담사 산내 암자인 오세암(五歲庵)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겼다. ‘一聲喝破三千界, 雲裏桃花片片紅(한 소리의 깨달음이 삼천 세계의 허망함을 깨뜨리니, 구름 속 복숭아꽃이 붉게 피어나 세상이 새롭게 빛난다)’ 이 오도송은 깨달음의 노래이자, 식민의 암흑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정신의 불꽃을 상징한다. 그에게 고향은 ‘정신의 조국’이었다.
1918년 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고 “마음이 곧 절대이며, 자유이며, 만능이다”라고 천명했다. 당시 서울 종로구 계동 43번지에 있었던 유심사는 우국지사들이 모이는 민족의 사랑방이자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서 41세의 만해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만세삼창을 선창했고, 3년의 옥고를 치른 뒤에도 ‘지옥에서 극락을 구했소’, ‘철창철학’ 등의 강연을 통해 청년들에게 불굴의 희망을 일깨웠고, 민중 계몽과 민족 단결을 촉진했다.
그는 또 불교 대중화 운동을 펼치며 불타정신(佛陀精神)의 체험, 합리적 종정 확립, 대중불교 실현 등 3가지 강령을 제시했고, 사찰령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이는 불교의 자주성과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실천이었다.
1926년 6월 1일 한용운은 출판사 회동서관(繪洞書館)을 통해 정신의 자유와 사랑의 깊이를 노래한 시집 ‘님의 침묵’을 세상에 내놓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이 시는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마음에 맴도는 영혼의 울림이 되고 있다. 한용운이 말한 ‘님’은 단순한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조국이자 진리이며, 부처이자 자유의 상징이다. 그리고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더 깊은 교감과 깨달음의 언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소통의 공간이다. ‘님의 침묵’이 불멸의 고전으로 남은 까닭은 그 문학적 완성도와 철학적 깊이, 민족적 상징성이 시대를 넘어선 영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한국 현대시의 본격적 서정시이자, 민족 구원의 기도문이었다.
북향집 심우장에서의 마지막 세월
1933년 만해는 서울 성북동에 북향집 심우장(尋牛莊)을 지었다. 남향으로 짓던 집의 주춧돌을 돌려세우며 그는 말했다. “그건 안 돼. 날더러 총독부를 바라보라니, 차라리 북향이 낫겠지.” 심우장은 일제의 그늘 속에서도 민족혼이 살아 있던 마지막 보루였다. 그는 이곳에서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고, 단재 신채호의 묘비명을 쓰며, 옥사한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주관하며 눈물을 흘렸다.
만해의 한용운의 투쟁 정신은 곧 호국불교의 파사현정(破邪顯正), 즉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내는’ 불퇴의 정신이었다. 그는 평화를 외면하고 폭력으로 남의 나라를 짓밟는 제국주의에 단호히 맞섰다. 학병징집 반대, 신사참배 거부, 창씨개명 반대 등 그의 저항은 자비를 근본으로 한 행동하는 불교, 곧 동일체적 실천의 철학이었다.
어려운 시절 문학과 불법(佛法)의 실천, 그리고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의 정신과 자주성을 일깨웠던 그는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불과 한 해 앞두고 북향집 심우장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육신은 떠났으나 그가 남긴 ‘정신의 향기’는 조국 하늘에 더욱 푸르다.
 
 
            한용운 스님이 출가하고 깨달음을 얻은 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은 그의 사상적 뿌리이며, 그에게 강원도는 불교적 체험과 깨달음의 고향이었다. 이 인연으로 오늘날 인제군은 만해문학박물관과 만해학교 등이 들어선 ‘만해마을’을 조성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로서 한 길을 걸었던 만해의 삶은 시대의 바람을 헤치고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한 줄기 등불이었다. 그의 강철 같은 의지, 대쪽 같은 절조, 그리고 끝없는 사랑은 오늘도 한국인의 정신 속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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