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작가라는 직업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책 한 권만 쓰고 싶었고, 그 뒤에는 다른 일, 특히 음악을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재즈 밴드에서 연주했고, 열네 살부터는 프로 음악가로 활동해온 그가 아니던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었고,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 자주 집을 옮겨야 했고, 가난한 마을에서 형편없는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광부로 일하기도 했고, 도시는커녕 마을도 없는 곳에서 수백 마리 소를 지키는 야간 경비원이 되기도 했다. 부다페스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의 문화관장이 돼 여러 마을을 돌기도.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모험적인 삶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그의 한쪽 주머니에는 카프카의 소설이, 다른 쪽 주머니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담겼다. 많은 헝가리 작가들처럼 술도 마시기 시작했다. 여러 마을과 도시를 오가며 밤에는 기차역과 술집에서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머릿속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몇 개의 작은 글들을 쓰기 시작하자 어쩐 일인지 경찰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정말입니다. 저는 정치와는 상관없습니다.” 경찰은 좀 아는 게 좀 있다고 겁을 주었다. “아니요, 저는 현대정치에 대해 쓰지 않습니다.” 정치 시위 같은 것에는 참가하지 않고, ‘문학청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László Krasznahorkai)는 작은 마을과 도시를 전전하며 첫 소설을 천천히 써내려갔다.
묵시록적이고 다분히 현실 비판적인 내용이라서 당시 공산주의 체제이던 헝가리에서 어떻게 출간될 수 있었을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1985년 첫 장편소설 『사탄탱고(Sátántangó)』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는 2018년 여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당시 문학 출판사 중 한 곳의 사장이 전직 비밀경찰서장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이 소설을 출판할 용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만큼의 권력 말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이 출판된 유일한 이유였을 겁니다.”
데뷔작 『사탄탱고』는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두며, 그를 헝가리 문단의 중심 작가로 끌어올렸다. 나중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화제가 됐으며, 다시 영어로 번역된 뒤 부커상(인터내셔널 부문)의 영예를 안겼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사탄탱고』를 대표작으로 마침내 2025년 노벨문학상마저 거머쥐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작품 세계를 “묵시록적 공포의 한가운데에서 예술의 힘을 다시 확증하는, 강렬하고도 예언적인 작품 세계”로 평가하며 선정 배경을 밝혔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학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작가 스스로 자신의 “최고의 소설”로 꼽은 데뷔작이자 대표작 『사탄탱고』를 추어야 한다.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이제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는 온통 악취 나는 진흙 바다가 펼쳐져 들길로 다니기도, 도시로 가기도 어려울 터이다), 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13쪽)
지치지 않고 내릴 가을장마의 첫 방울이 떨어지던 1980년대 후반 어느 시월 아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해서 번 품삯을 받으러 집을 비운 슈미트의 부인과 잠자리를 가진 후터키는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다. 근처 교회도, 종도 없는 곳에서 울려오는 이상한 종소리는 어떤 불길한 사건이 예고하는 것만 같다.
헝가리의 해체된 집단농장 마을에 남아 있던 이들은 가난과 서로에 대한 불신의 늪에 빠져, 무기력한 가운데 비열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품삯을 가로채 떠나려는 슈미트, 이런 슈미트를 위협해 함께 돈을 나눠 가지려는 후터키, 많은 사람들과 몸을 나누는 슈미트 부인, 몸을 파는 호르고시의 딸들….
“그는 자신이 돈을 손에 쥐기도 전에 잃어버렸음을 깨달았고, 오래 전부터 예감한 일이 사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은 그는 떠나려고 해본 적도 없었다.”(32쪽)
그런데 이웃 헐리치 부인이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리미아시는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 성도 지을 수” 있는 “위대한 마법사”(후터키)이자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인식돼 왔다.
가을비와 함께 그가 귀환한다는 소식에, 마을은 묘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절망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어 품삯 따위는 이미 안중에 없고, 스스로의 힘에 의한 해결을 포기한 채 그의 귀환만을 기다린다.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가난과 불신에 억눌리고 감춰져 있던 욕망을 비로소 들추어내고 그것에 취해 한바탕 탱고를 춘다. 앞으로 여섯 스텝 그리고 뒤로 여섯 스텝….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장밋빛 미래가 아닌 실패한 체제가 고안해낸 악랄한 기만. 공동체가 함께 일한 대가로 받은 공동의 품삯을 갈취해 도피하려는 지저분한 음모와 소동의 연속이다.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끊임없이 내리는 가을비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종소리, 보이지 않는 거미들이 친 거미줄은 한 세계의 몰락이라는 공포를 부추긴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붕괴한 세계, 그럼에도 하나로 옭아매어져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하는 소설적 장치로 읽힌다.
이야기는 탱고 스텝에 따라 앞으로 여섯 스텝 나갔다가(제1부), 다시 뒤로 여섯 스텝 물러나며 출렁거린다(2부). 즉, 제1부는 1장에서 시작해 6장으로, 2부는 역순으로 6장부터 시작해 1장으로 끝맺으며 독특한 순환 구조를 취한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 행들은 다시 소설의 첫 행으로 돌아오는데.
“다시 연필을 든 그는 이번에는 자세가 제대로 잡혔다고 느꼈다. 종이는 충분했고, 술과 약도 봄까지는 버틸 만했다. 게다가 문에 박은 못이 빠지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가 먹은 떨어질 즈음, 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을 깨어났다….’”(395쪽)
각 장마다 등장인물의 시점도 달리한다. 주민 후터키, 귀환하는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스스로 유폐된 의사, 사랑방 같은 술집의 주친, 다락방 소녀 에슈티케…. 이들 모두 문제적 인물들이다. 이리미아시에 적극 동조하는 후터키도 전형적이면서도 모순적이고, 무방비 상태의 천사 같은 다락방의 소녀 에슈티케 역시 연결된 부조리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술값을 떼먹은 이리미아시보다 오히려 돈과 숫자를 믿는 술집 주인은 또 어떤가.
“그는 숫자 속으로 피신했다. 숫자에는 어리석을 정도로 과소평가되는 ‘고귀한 단순성’이랄지, 신비로운 효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성과 효력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첨예한 각성이 일어났다. 그것은 ‘전망을 가질 수 있다는 상태’를 뜻했다.”(132쪽)
특히 스스로 고립돼 마을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강박적으로 관찰하는 의사는 논쟁적인 인물이다. 매일 독주를 마시고 창가의 감시대에 앉아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미세한 움직임과 균열을 기록한다.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오로지 기억만은, 그가 맺은 계약이 깨져 죽음과 몰락이 그의 뼈와 살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을 것”(87쪽)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런 의사의 모습은 마치 작가의 페르소나 같기도.
“그는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하찮은 세부라도 놓쳐선 안 되었다.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고 간과하는 것은 몰락과 질서 사이에 놓인 흔들리는 다리 위에 아무런 대책 없이 서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담배 부스러기나 야생 거위가 날아간 방향이나 별 뜻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 같은 것들도 그 연결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관찰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도 어느 날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서 저 끊임없이 무너져가는 질서의 말 못할 포로가 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88쪽)
작품의 번역자이자 시인인 조원규는 작품 해설에서 작가가 예견한 몰락은 아마도 정치적 저항의 표현이었을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사탄탱고』가 궁극적으로는 그리고자 한 것은 의사 같은 희망하는 인간이라고 분석했다.
“아직 체제가 유지되던 동안에 작가가 그려낸 ‘몰락’은 정치적 저항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으리라….이 작품은 한 시기의 체제 비판을 넘어서 좀 더 항구적인, 희망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 문학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다.”(400쪽, 「해설」 중에서)
작품은 1994년 헝가리 작가주의 영화감독 벨라 타르(Béla Tarr)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의 원작이 되었고, 영어로 번역된 뒤에는 2015년 부커상(인터내셔널 부문)을 그에게 안겼다. 당시 부커상 심사위원장이었던 머리나 워너는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음역을 가진 몽상가적 작가다. 그는 겁이 나고 낯설면서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웃긴 장면을 만들어낸다”고 평했다. 그 역시 부커상 수상 소감에서 “아마도 나는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독자들을 위한 작가인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요컨대, 대표작 『사탄탱고』는 몰락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각종 부조리에 포박당하고 체제에 유린당해 부조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의 악순환을 절망의 묵시화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재즈 밴드에서 연주하는 것이 즐거웠던 소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형처럼 되고 싶어 형의 책을 훔쳐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은 카프카의 소설 『성』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 무척 관심이 쏠리는 작가였다. 이때부터 카프카의 작품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그렇게 카프카는 자신의 첫 작가가 됐다. 크러스너호르커이에게 문학의 씨가 뿌려지던 순간이었다. 그는 나중에 2018년 여름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저는 프란츠 카프카가 제가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경이로울 수밖에 없는 제국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 제국이 존재하고, 단테와 괴테, 베케트, 호머 같은 인물들이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낍니다. 이 인물들, 이 성스러운 인물들에 대한 모든 생각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카프카는 당신이 생각하는 카프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탱고』을 앞세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1954년 헝가리 남동부의 작은 도시 줄러(Gyula)에서 변호사 아버지와 사회보장국 직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알리지 않다가 그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에야 그 사실을 공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73년 자신의 첫 작가 카프카처럼 요제프 아틸라대(현재 세게드대)의 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얼마 뒤 법학과의 폐쇄적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법학부뿐 아니라 도시 자체를 떠났다. 1976년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로란드대(ELTE)로 전학해 법학 과정을 이어갔고, 다시 1983년까지 헝가리어와 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1985년 첫 장편소설이자 대표작 『사탄탱고』를 발표, 헝가리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당초 한 권의 책만 쓰고 싶었지만, 첫 번째 책 『사탄탱고』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다시 두 번째 책을 썼다. 두 번째 책에도 만족하지 못하면서 세 번째 책을, 네 번째 책을 차례로 썼다. 장편소설 『저항의 멜랑콜리(The Melancholy of Resistance)』(1989), 『전쟁과 전쟁(War and War)』(1999), 『뱅크하임 남작의 귀향(Baron Wenckheim's Homecoming)』(2016), 소설집 『서왕모의 강림(Seiobo There Below)』(2008), 『마지막 늑대(The Last Wolf)』(2009), 『세상은 계속된다(The World Goes On)』(2013) 등을 발표했다.
특히 1989년 발표한 두 번째 장편소설 『저항의 멜랑콜리』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거대한 고래 사체를 전시하는 유령 서커스단이 도착하면서 펼쳐지는 광기와 불안의 서사를 그렸다. 이때 미국 비평가 수전 손택은 작품을 “가장 오싹한 상태의 황량함에 대한 해부서이자, 그 황량함에 대한 저항의 지침서”라고, 작가를 “현대 문학의 묵시록의 대가(Master of the Apocalypse)”라고 극찬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문학의 특징은 ‘현대 묵시록의 대가’라는 평처럼 종말론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정서와, 인간 존재의 불안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탐구, 난해하고 도전적인 문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서왕모의 강림』을 비롯해 적지 않는 작품이 길고, 마침표가 거의 없는 문장으로 이뤄져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작가가 마침표를 “문장 사이의 인위적인 경계”로 보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카프카나, 토마스 베른하르트, 주제 사라마구, 로베르토 볼라뇨 등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됐고, 몇 개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아울러 헝가리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Kossuth 문학상과, 독일의 Brücke Berlin 문학상, 부커상, 노벨문학상 등 국내외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최근 노벨상위원회와 인터뷰에서 “씁쓸함”을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라고 꼽은 그는 암울한 시대의 글쓰기에 대한 개인적 의미를 강조했다. “사실 이건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죠. 저는 보통 제가 쓴 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훌륭한 작가나 시인 친구들에게 보여주지도 않아요. 책을 쓰고 나면 출판사에 넘기고, 그 후에는 시간이 좀 걸리죠.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시작해서 이전보다 더 나은 책을 만들 거예요.”
세상은 아직 부조리하고 사탄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니 국가와 민족, 지역을 불문하고 오히려 횡행하고 있진 않는가. 거짓된 카리스마의 공산당 정보원 이리미아시뿐일까. 그들을 구원자로 바라보고자 했던 사람들의 노예 도덕이야말로 진정한 사탄 아닐까. 심지어 작가는 부조리한 시대에 여전히 모순적인 현대의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리미아시의 입을 빌려 직설적으로, 노골적으로, 가차 없이.
“생각이라고? 그자들은 뼛속까지 노예지. 평생토록 그래왔으니까. 부엌에서 꾸물거리고 으슥한 데서 똥 싸고 창가에서 남들이 뭘 하나 몰래 훔쳐보기나 하고. 그게 다야….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끝도 없이 기다리다가, 누군가 자기들을 속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겠지. 돼지를 잡는데 혹시 뭐 주워 먹을 거라도 떨어질까 싶어 바닥에 배를 댄 채 도사리고 앉아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말이야. 그자들은 옛날 성에서 시중을 들던 때와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어. 주인은 벌써 머리에 총알을 박고 자살했는데, 저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체 주위에서 우왕좌왕하는 거야…. 주인 잃은 노예들인 주제에 명예와 자부심과 용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들 하지. 그 믿음으로 저자들은 살아가는 거야. 둔한 마음 깊은 곳에선 저런 덕목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저 말들의 그늘 속에서 살고 싶은 것뿐이니까.”(70~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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