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남정훈 기자] “5차전 9회엔 김서현이 마무리로 나올 겁니다”
한화 김경문 감독이 지난 22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25 KBO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4-0으로 앞서다 4-7로 충격의 역전패를 당한 뒤 패장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진짜 김경문 감독은 5차전 1점차 리드 상황에서도 김서현을 올릴 수 있을까. 아니면 이번 가을야구에서 등판할 때마다 족족 얻어맞고 있는 어린 마무리에 대한 격려성 발언이었을까.

올해 3년차 시즌을 맞이한 김서현은 선수생활의 전환점을 맞았다. 시즌 초반 마무리로 낙점한 주현상이 부진을 보이자 김경문 감독은 불펜진 중 가장 빼어난 구위를 보유한 김서현에게 마무리 보직을 넘겼다. 7월까지만 해도 1점대 평균자책점(1.55)을 기록하며 리그 최강 마무리로 거듭나는 듯 했던 김서현은 8월 들어 8.4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큰 부진에 빠졌다. 김서현의 부진 속에 한화는 후반기 폭주모드를 보이던 LG에게 선두 자리를 빼앗겼다.
9월 들어 다시 제 구위를 되찾은 듯 했던 김서현은 한화가 1위를 위한 타이브레이커를 성사시키느냐 마냐가 달렸던 지난 1일 SSG전에서 9회 5-2로 앞선 3점차 상황에 등장했다가 2사를 잘 잡고도 투런포 두 방을 맞고 충격의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정규시즌 마지막 등판에서의 충격이 컸을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도 김서현은 등판할 때마다 얻어터지고 있다.

지난 18일 플레이오프 1차전에 9-6으로 앞선 9회 세이브를 위해 마운드에 올랐지만, 선두타자 이재현에게 홈런을 맞은 뒤 김태훈과 이성규에게 안타를 맞고 한 점을 더 내줬다. 9-8까지 쫓기자 급해진 김경문 감독은 김서현을 내리고 김범수를 올려 간신히 승리를 지켜냈다.
마무리 김서현이 흔들리자 한화의 마운드 운용은 기형적으로 변했다. 5-4 승리를 거둔 3차전이 그 예다. 이날 김경문 감독은 6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문동주를 9회까지 던지게 했다. 워낙 문동주의 퍼포먼스가 뛰어났기에 내린 과감한 결단이지만, 그 기저엔 마무리 김서현을 믿을 수 없다는 게 깔려있는 투수 운용이었다.
3차전까지 2승1패로 앞서며 맞이한 4차전. 한화는 1회 문현빈의 적시 2루타와 5회 문현빈의 쓰리런 홈런으로 삼성 선발 원태인을 무너뜨렸다. 이제 4점 리드만 지켜내면 2006년 이후 19년 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초 경기 전만 해도 “외국인 투수들도 오늘 불펜에 대기한다”던 김경문 감독이었지만, 임시 선발 정우주가 3.1이닝을 던지고 내려간 뒤 마운드에 오른 투수들은 김범수, 박상원이었다. 두 투수가 5회까지 삼성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뒤 맞이한 6회. 마운드에는 황준서가 섰다. 그러나 김지찬에게 3루타, 김성윤에게 볼넷을 내준 황준서는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쫓겨내려갔다. 그리고 한화 벤치의 선택은 김서현이었다. 이제 김서현의 보직이 마무리 고정이 아님을 뜻함과 동시에 이 위기를 잘 넘긴다면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믿고 쓸 수 있겠다는 포석이 깔린 기용이었다.
그러나 김서현 기용은 ‘최악의 수’가 됐다. 디아즈를 땅볼로 잡아냈지만, 김영웅에게 동점 쓰리런을 맞으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김영웅이 156km, 155km 포심 패스트볼 1,2구에 헛스윙하며 타이밍이 늦은 것을 봐서였을까. 김서현의 3구도 역시 포심 패스트볼이었지만, 코스가 앞의 1,2구와는 달랐다. 어퍼스윙을 하는 김영웅에게는 안성맞춤인 가운데 낮은 코스였고, “앞의 두 번의 헛스윙에 타이밍을 늦는 것을 봤기 때문에 분명 3구도 직구가 올 것이라 확신했다”던 김영웅은 포심이 또 한 번 들어오자 이를 단번에 걷어올려 우측담장을 넘겼다. 김서현이 던진 3구가 벤치의 사인이었는지, 포수 최재훈의 사인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 하나가 승부를 바꿀 수 있는 큰 경기를 감안하면 벤치 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홈런 맞은 건 김서현이었지만, 결국 한화 벤치의 패착이었다는 얘기다.

기가 오른 김영웅은 7회에도 1사 1,2루 상황에서 한승혁을 상대로 또 한번 쓰리런 홈런을 뽑아냈다. 김영웅의 ‘영웅적 활약’에 삼성은 기사회생했다.
통한의 역전패 속에서도 김경문 감독은 김서현을 믿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김서현 선수 없이 한두 경기는 이길 수 있어도, 김서현 선수가 일어나야 한화가 우승한다”고 김서현을 두둔했다. 이어 “맞은 건 결과론이다. 자꾸 맞다 보니까 위축돼서 그렇지, 공 자체는 좋았다. 대전에서 열리는 5차전에는 김서현 선수가 마무리로 출전한다”고 재확인했다.


김경문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는 뚝심, ‘믿음의 야구’다. 17년 전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때도 이런 상황이 있었다. 당시 이승엽 전 두산 감독을 4번 타자로 기용했던 김경문 감독. 이승엽은 일본과 준결승 전까지 타율 0.130(23타수 3안타)의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뚝심 있게 이승엽을 4번 타자로 계속 기용했고, 결국 이승엽은 일본전에서 8회 결승 2점 홈런을 때려내며 김경문 감독의 무한 신뢰에 부응했다.

그때처럼 김경문 감독이 진짜 5차전 9회 세이브 상황에서 김서현을 기용할 수 있을까. 다만 17년 전과 지금 다른 게 하나 있다. 이승엽은 올림픽 기간 내내 부진했지만, 이미 한국 프로야구를 평정하고 일본에서도 한 시즌에 40홈런을 넘긴 적 있는 그야말로 ‘국민 타자’였다. 반면 김서현은 이제 3년차의 신예에다 올 시즌이 마무리 보직 첫 시즌이다. 검증되지 않은 자원이란 얘기다. 김경문 감독의 뚝심이 또 한 번 김서현이라는 유망주를 살려낼 수 있을까. 이래저래 많은 게 달린 플레이오프 5차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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