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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저녁을 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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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20 22:53:33 수정 : 2025-10-20 22: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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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

골목 끝 벽돌 담장이 붉게 물드는 사이

 

가게 셔터가 내려지고

개 짖는 소리는 저 멀리 스러져요

 

낮에 남겨둔 햇살 대신

노을빛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접어 넣으면

 

새로 일어난 저녁의 감정들이

붉은 띠를 두르고 아롱아롱거려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은 소녀에게 다가가

주머니 속 빛으로 살짝 덮어줬어요

그 아이는 하품처럼 웃었어요

 

버스는 저녁이 사라지기 전에 도착할 거예요

혼자 있는 저녁은

무섭거나 외롭거나 고독하니까요

(하략)

오늘은 만원 버스에서 저녁을 맞았다. 반쯤 열린 창으로 노을빛이 천천히 밀려들었다. 무심결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금 막 새로 일어나는 “저녁의 감정들”을 사람들도 느꼈을까. 하나같이 어깨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굳은 표정을 한 사람들. 손잡이를 제대로 붙들지 못해 수시로 흔들리면서도 좀체 휴대폰을 놓지 못한 사람들. 그 속에, 다름 아닌 휴대폰 속에 “붉은 띠를 두르고 아롱아롱거리는” 진짜 저녁이 있기라도 한 듯이.

 저녁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노을빛을 주머니에 넣어 오지는 못했다. 거기 누구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무섭거나 외롭거나 고독”한 탓에 저녁이 오고 가는 것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밥을 먹는 내내 유튜브를 틀어 두었다. 영상 속에는 역시 밥을 먹는 한 사람이 있고, 그의 식탁은 어딘가 허전하고, 혹 내 몫의 노을빛이 남아 있다면 그에게 조금 나눠 줘야지 생각했다.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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