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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에 정책문서 1만 상자 ‘차곡차곡’… 민주주의 산역사 [심층기획-매니페스토-내일을 바꾸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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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20 06:00:00 수정 : 2025-10-20 07:26:14
런던·옥스퍼드=글·사진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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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영국 - 200년 쌓아온 유권자와의 약속

처칠·볼드윈 등 역대 공약 자료 한자리
회의록·정치인 서신 등 완벽 보존 노력

정치인 연설서 출발 전략 문서로 진화
단순한 공약 넘어 국가 비전 자리매김

여러 자문단 의견반영 초안 작성 중요
“의사결정 과정 시민 참여 적극 독려를”

“일본과의 전쟁이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 승리로 이끈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 1945년 8월 총선을 앞두고 내놓은 선거공약을 담은 매니페스토의 도입부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만난 제러미 매킬웨인 보들리언 도서관 특수자료실 수석 아키비스트(기록물관리전문가)는 이 공약집 ‘처칠의 유권자에게 드리는 선거 정책선언문’을 수장고에서 조심스레 꺼내왔다.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언 도서관 내에 위치한 보수당 기록보관소 수장고의 모습. 가운데 사진은 1951년 총선을 앞두고 영국 보수당이 낸 정책 공약집 표지와 1945년 영국 총선 윈스턴 처칠 총리의 매니페스토 정책공약집. 보들리언 도서관 제공

과거 개별 정치인의 연설문에서 발전해 정당 명의로 나온 첫 매니페스토의 원본이 국내 언론에 최초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20쪽 분량 책자는 빛바랜 종이 색을 제외하면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보존 상태가 뛰어났다. 80년이란 세월이 무색했다. 처칠은 이 공약집에서 전후 복구와 세계질서 유지 방안을 제시하고 영연방 결속 강화, 식민지 복지 및 자치 확대, 강력한 국방력 유지 등을 약속했다. 보수당은 그해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잘 보존된 기록은 당시 정국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료가 됐다.

◆282개 색인, 1만 상자 분량 보관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보들리언 도서관에서도 10년 전 107년 만에 현대식으로 재건축한 웨스턴 도서관에 있는 보수당 기록보관소(Conservative Party Archive·CPA)는 특별하다. 옥스퍼드대 학생이나 교수, 영국 거주지가 증명된 연구자에 한해서만 심사를 거쳐 열람실 이용이 허락된다. 취재진에게도 도서관 보안 담당자는 “연필 외에는 자료를 오염시킬 우려가 있는 볼펜이나 물도 지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매킬 웨인 수석, 다이아몬드 교수

이곳은 1868년부터 현재까지 영국 보수당 계열 정당 자료가 빼곡히 보관돼 있다. 매니페스토는 물론 회의록, 정치인 서신, 정책 초안, 선거 포스터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1978년 옥스퍼드대와 보수당 간의 협정에 따라 당 사무실과 뉴캐슬대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문서를 한 곳으로 모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이 도서관에서 20년째 근무 중인 매킬웨인 수석은 “색인만 282개, 문서 상자가 1만여개에 달한다”며 “전담 사서와 보조원이 자료를 수집하고 온·습도에도 신경을 써 관리한다”고 했다.

그는 1929년 스탠리 볼드윈 보수당 전 총리의 매니페스토 공약집도 취재진 앞에 꺼내 보였다. 당시 총선은 21세 이상 여성에게 처음 투표권이 부여된 해다. 손끝으로 종이를 집어 한 장씩 천천히 넘기던 그는 “이 공약집에는 ‘입양, 영아보호, 혼인 연령에 관한 법률 개혁 등을 통해 보수당은 여성과 아동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기록보관소 운영을 위한 재정적 책임은 정당이 맡고 있다. 매킬웨인 수석은 “매년 자료 수집을 위해 보수당과 1년에 4∼5번 회의를 한다”며 “당내 주요 자료를 직접 받기도 하고, 여러 경로로 직접 수집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한국은 정당 경상보조금의 30%를 정책연구소에 배당하게 돼 있지만 이를 자료 수집·보관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정당 기록은 결국 민주주의 역사가 된다. 매킬웨인 수석은 “CPA는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담은 문서 초안도 함께 보존하고 있다. 이것이 정책 결정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다양한 시민 목소리 담아야

공약의 요구사항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지난 13일 런던 중심부 템스강 남쪽에 있는 서더크 지역의 한 카페에서 만난 패트릭 다이아몬드 퀸 메리 런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매니페스토는 단순한 공약의 나열이 아니라 선거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며 “정당이 정책이나 입장을 유권자에게 밝히는 일련의 활동”이라고 정의했다.

노동당 집권기인 2010년 서더크의 지방의원을 지낸 그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와 고든 브라운 전 총리 시절 ‘다우닝가 10번지’로 불리는 총리실에서 정책고문 등을 역임했다. 그는 노동당의 총선 매니페스토 작성에도 깊이 관여한 정책통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여야 정당의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다양한 분야의 자문단이 정당에 조언하면 현실성을 따져 유권자에게 잘 닿을 수 있는 초안이 작성된다”며 “이 과정에서 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위원회 등 다양한 주체가 논의에 참여한다. 집권당은 총리가 직접 참여하는 공약도 있다”고 설명했다.

매니페스토는 유권자와의 약속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단순히 표를 얻기 위해 매니페스토를 만들어선 안 된다”며 “빈말을 하지 않도록, 과장하지 말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이 아닌 신중한 유권자와의 신뢰를 적어야 한다. 공약의 나열이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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