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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장군 후손 “한국인이 기억해줘 감사”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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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16 14:26:45 수정 : 2025-10-16 14:26:45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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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 동맹 성립 70주년을 기념해 미국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수도 워싱턴의 6·25 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찾은 윤 대통령 부부는 평범해 보이는 미국인 노부부와 마주했다. 한국에서 전사한 루터 스토리 상병의 유족이라고 했다.

 

스토리는 1950년 9월 1일 경남 창녕에서 전투 도중 실종됐으며, 불과 얼마 전에야 시신의 신원이 확인됐다. 1950년 9월 초라는 시간, 그리고 창녕이란 공간이 말해준다. 스토리는 6·25 전쟁 초반 가장 치열한 혈투였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15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한 월턴 워커 장군의 유족들이 기념관 2층 전시실에서 1950년 8∼9월 당시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상황에 관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전쟁기념사업회 제공

1950년 8∼9월 한국 영토는 영남 지역으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마저 뚫리면 대구는 물론 임시수도 부산마저 북한군 수중에 떨어질 판이었다. 국가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 미 육군 중장 월턴 워커(1889~1950) 장군에게 방어선 사수의 책임이 부여됐다.

 

그는 병사들한테 “지켜라, 못하겠거든 죽음뿐”(Stand or die)이라고 외쳤다. 당시 미군 장병들 가운데 한국이 대체 어떤 나라인지, 이번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워커 장군은 병사들에게 대놓고 목숨을 내던질 용기를 주문한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면 인천상륙작전이 과연 가능했을까. 한국은 지금 대만과 같은 처지가 됐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지도에서 영영 사라졌을 수도 있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을 맞은 1950년 12월 워커 장군은 지프차를 타고 전투 지휘소로 가다가 경기 의정부 일대(오늘날의 도봉산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미국으로 운구된 고인의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미 행정부는 그에게 중장에서 대장으로의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광진구의 전망 좋은 언덕 위 워커힐(Walker Hill) 호텔은 고인의 이름을 따 지었다. 흔히 ‘한·미 동맹의 심장부’로 불리는 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는 높이가 3m에 이르는 워커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왼손엔 망원경을 들고 오른손으론 어딘가를 가리키는 늠름한 자태가 철통같은 대비 태세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미 육군 월턴 워커 장군(사후 대장 추서)의 동상. 높이가 3m에 이르는 이 동상은 2010년 서울 용산 미군 기지에 세워졌다가 2018년 용산 기지가 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며 함께 옮겨 갔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워커 장군의 손자 샘 워커 2세 등 고인의 유족들이 15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 2층 전시실에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개시와 전개, 그리고 결말을 생생히 묘사한 전시물이 있다. 또 기념관 외곽의 미군 6·25 전쟁 전사자 명비(名碑)에는 수많은 전우들과 더불어 고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날 가족과 함께 전시물을 둘러보고 전사자 명비에 헌화한 샘 워커 2세는 “한국 국민이 조부의 희생과 공헌을 기억해줘 감사 드린다”며 “지금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의 자유 수호에 조부가 기여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많은 관람객이 워커 장군의 숭고한 희생 정신과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되새긴다”고 화답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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