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별성제 및 여성의 왕위 계승 반대 입장 확고
“가뜩이나 보수적인 자민당에서도 가장 오른쪽”
일본 집권 자민당에서 여성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재가 탄생하며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 등장이 확실시된다. 의석 수로 따져 국회 다수당 총재가 총리를 맡는 것이 일본 정치사의 확립된 관행이기 때문이다. 여성 총리는 서방을 대표하는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보수적이란 평가를 듣는 일본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AFP 통신은 5일(현지시간)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 그러나 다카이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도쿄(東京)발로 보도했다. 기사는 일본을 “여전히 매우 가부장적인(patriarchal) 국가”로 규정하며 “젠더 사안에 관한 다카이치의 정책적 입장은 가뜩이나 보수적인 자민당에서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고 전했다.
‘부부동성제’는 일본 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꼽힌다. 이는 남녀가 결혼하면 같은 성(姓)을 써야 한다는 민법 조항을 지칭한다. 이론상 남편이 아내 성을 따르는 것도 가능하지만 현실에 있어선 일본 부부의 95% 이상이 남편 성으로 통일한다. 결혼 후 아내가 미혼 시절 쓰던 성을 버리고 남편 성을 따르는 것이 일종의 전통으로 여겨진다는 의미다.
일본 여성 상당수는 어릴 때부터 사용해 온 이름을 바꿔야 하는 불편함이 싫어 부부동성제를 기피한다. 대신 한국처럼 여성이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부부별성제’를 선호한다. 여성은 물론 남성까지 대상으로 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 10명 중 약 7명은 ‘민법 개정을 통해 부부별성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다카이치는 부부별성제에 반대하고 부부동성제 유지를 옹호하는 입장이다. 그는 “자민당이 부부별성제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 당을 지지하는 보수층이 이탈할 수 있다”며 “보수 정당으로서의 ‘자민당다움’을 견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입헌군주제 국가인 일본에서 국가원수인 국왕에는 남성만 오를 수 있도록 한 제도 또한 논란거리다. 당장 아들이 없는 현 나루히토(德仁) 일왕은 그의 딸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가 없다. 현재로선 일왕 유고시 동생인 후미히토(文仁) 왕세제가 왕위 계승 1순위다. 일본 국내에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심지어 2024년 10월에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까지 나서 일본 정부에 “부계 남성만 왕위를 계승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법률을 시정하라”고 촉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다카이치는 지금처럼 남성만 일왕이 될 수 있도록 한 제도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는 처음 자민당 총재 선거에 도전했던 2021년 9월 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현행 일왕 제도는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물론 일각에선 다카이치 총리의 출현이 일본의 여권 신장에 어느 정도 기여할 것이란 기대감도 내비친다. 현재 64세인 다카이치는 폐경 이후 자신이 겪은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여성 건강권 신장을 위한 노력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고 말했다. 집권하면 “노르딕(북유럽 5개국)에 버금가는 내각을 구성하겠다”는 약속도 내놓았다. 노르딕이란 대표적 복지 국가이자 남녀 평등 선진국으로 꼽히는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아이슬란드를 뜻하는데, 이들 국가는 오래 전부터 내각의 절반가량이 여성 장관이며, 최근 들어선 총리를 비롯한 각료 과반이 여성인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결국 다카이치의 언급은 새로 내각을 꾸리며 여성 정치인을 대거 장관에 발탁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현 총리의 경우 자민당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란 평가를 듣는 정치인임에도 약 1년간 존속한 그의 내각에 여성 각료는 단 두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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