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관세협상 난항을 틈타 여권 내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있어 걱정스럽다. 더불어민주당 내 친명(친이재명계) 조직인 ‘더민주혁신회의’는 지난 주말 논평에서 한국의 대미 투자금 3500억달러가 ‘선불’이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발언을 향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정도가 있다”고 성토했다. 이들은 “무도한 관세협상으로 국민 주권을 훼손하는 미국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한다”고도 했다. 아무리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여론전이라고 해도 여권 인사들의 섣부른 반미선동은 금물이다. 가뜩이나 힘든 협상이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혁신회의는 지난 23일에도 “국민 1인당 1000만원의 부당한 청구서”라며 미 여행 보이콧, 미 제품 및 주식 불매운동까지 거론했다. 5선의 친명 중진인 김태년 의원은 “날강도식 압박”이라며 “길목을 막고 돈을 뜯어내는 깡패와 다를 바 없다”고 쏘아붙였다. 여권의 반미선동은 국민 불안을 부추기고 국익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권은 가급적 거친 막말과 비방을 자제하고 협상 과정을 차분히 지켜보는 게 옳다.
물론 화근은 트럼프의 황당한 투자 압박이다. 외환보유액의 84%에 해당하는 3500억달러를 현찰로 내놓으라는 건 누가 봐도 부당하고 자칫 외환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은 우리가 필수조건으로 제시한 무제한 통화스와프도 들은 척도 않는다. 그렇다고 판을 깼다가는 어느 쪽이 더 큰 피해를 볼지는 자명하다. 협상 결렬은 주요국 중 무역의존도가 가장 큰 우리 경제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다. 섣부른 대미 강경 메시지가 트럼프를 자극해 지금보다 더 고율의 관세부과나 다른 보복조치로 이어질 수 있다. 한·미는 안보동맹으로도 깊이 엮여 있지 않은가. 어떤 경우든 안보 근간인 한·미동맹의 틀까지 허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은 인내심을 갖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봐야 할 때다. 정부는 3500억달러 직접투자가 왜 불가능한지 설명하고 미 제조업 부흥에 한국이 최적의 파트너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동시에 트럼프의 체면을 살릴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쌀과 소고기 추가개방을 포함해 모든 경제·안보 현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합리적인 수준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전략적 결단이 필요하다. 통화스와프도 무제한이 어렵다면, 대미 투자금액과 기간 등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한다면 접점 찾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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