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측·기관 간 계약서 상에는
‘민·형사상 책임 안진다’ 못박아
배식 대상자에 ‘기부’ 고지 안 해
현장 인력·인프라 부족 문제도
“전수 조사 통해 투명성 높여야”
경기 지역의 한 장애인 거주시설에 사는 A씨는 최근 부당한 업무 지시를 받았다. 인근 4개 학교에서 배식하지 않은 ‘잔반’을 옮긴 뒤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A씨는 시설 음식이 학교에서 조리됐다 기부된 음식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올여름 돌봄 센터를 비롯한 사회복지시설에서 집단 식중독 사례가 발견된 가운데 서울·경기 등 4개 지역 학교에서 사회복지기관과 맺은 잔식 기부 계약서에 식중독이 발생해도 ‘어떠한 민·형사상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시민단체 반발이 커지고 있다.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22일 잔식을 배식받는 장애인, 노숙인 등 당사자에게 ‘기부된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리거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해 8월 기부에 한해 조리된 음식의 외부 반출을 허용하면서 학교에서 조리된 예비식이 사회복지기관 등에 전달되고 있지만, 장애인 시설 이용자와 관련 기관 등 현장에서는 “관리 책임이 모호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승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 국장은 “A씨 사례에서 보듯 기부된 음식이 시설로 넘어간 이후 영양 관리나 환경을 담보할 안전장치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면서 “학교에서는 영양관리사가 배정돼 있고 의무 사항을 규정하고 책임을 지도록 하는데, 기부받은 잔식에 대한 관리 책임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지적했다. 시설이나 복지관으로 음식이 넘어가면 처리 과정을 확인할 수 없는데도 계약서상에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명문화한 것이 무책임한 조치라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인력과 인프라 부족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왔다.
한 푸드뱅크 관계자는 “이전에는 안전상 이유로 식자재나 우유 같은 가공식품만 기부를 받았는데 식약처 유권 해석 후 잔식 기부도 맡아서 하고 있지만 인력이나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경기 지역에서 잔식 기부 사업을 진행하는 급식 지원 단체 관계자도 “푸드뱅크는 복지부 산하 기관이라 관리 기준이 까다롭지만 기관들이 알아서 냉장탑차 구비, 배식 인력 관리 등 인프라를 갖춰야 하는데 잘 지켜질지 의문”이라고 했다.
현행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은 집단급식소의 설치·운영 시 ‘배식하고 남은 음식물을 다시 사용·조리 또는 보관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지난해 8월 식약처가 기부 식품에 한해서는 허용한다고 판단했다. “조리된 음식이 배식대에 제공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교차 오염 및 이동 중 미생물 번식에 의한 식중독 발생 우려 등의 사유”로 잔식 기부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지 4개월 만이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음식물 쓰레기 감소, 소외 계층 지원 등 복지부와 환경부 입장을 고려했다”며 “식약처는 잔식 보관과 운반 과정의 관리 기준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세계일보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이 받은 ‘2025년 7월 기준 잔식 기부 계약서’를 전수 분석한 결과 서울, 경기, 충남 지역에서 146개 학교가 잔식 기부를 진행하고 있다. 푸드뱅크를 통해 기부하는 곳은 38개교뿐이었고 나머지는 일대일 협약 형태다. 수령 기관은 모두 44곳으로 노인 대상 급식 시설이 11곳, 장애인 10곳, 노숙인 6곳 등이다.
조인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기부법에 따라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고 하지만 식품은 관리가 안 되면 치명적인데도 당사자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아 권리 침해가 심각하다”며 “전수조사를 통해 관리의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 의원은 “잔식 기부 관리 체제가 미비한 상태에서 환경적 측면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며 “정부가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고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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