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맥베스’를 히치콕 누아르풍으로 재해석한 이머시브 시어터”
“7층 공간 100여 개 방 누비며 감각으로 완성하는 새로운 공연 경험”
“언어 대신 움직임과 감정으로 서사 전달… 반복 관람 부르는 무대”
“뉴욕·상하이를 넘어 서울에서 선보이는 역대급 규모의 체험극”
‘슬립 노 모어’가 옛 대한극장에 들어선 공연장 ‘매키탄호텔’에서 시작됐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진 극의 3 요소 ‘배우·관객·무대’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린 작품이다. 지난해 국내 공연이 예고됐을 때부터 과연 어떤 작품일지 큰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드러낸 대작의 정체성은 ‘압도적인 리얼’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스릴러 거장 히치콕의 누아르 풍으로 재해석한 서사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압도적 현실감이 느껴지는 의문의 공간을 마치 스릴러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펴 나가는 체험이 워낙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먼지 한 톨’까지 신경 썼다는 제작사 설명만치나 모든 공간과 그 속 물체는 ‘디테일’이 살아있다. 철저한 체크인 과정을 거친 후 어둑한 복도를 통과해서 공연장에 입장한 순간부터 느껴지는 공간향마저 인상적이다. 굉음 수준이나 찌그러짐 없이 들리는 배경음악은 희뿌연 공기를 뒤흔들고 정교하게 설계된 조명은 이를 비춘다. 사운드 디자이너 스티븐 도비는 “서울 공연은 기술적 사운드 구현에서 지금까지의 최고치”라며 “청각적으로도 완전한 몰입을 경험할 수 있도록 건물 전체를 입체 음향 시스템으로 설계했다”고 21일 개막회견에서 설명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진 ‘슬립 노 모어’ 미쟝센의 ‘리얼함’은 왜 이 작품이 2003년 런던 초연 이래 ‘이머시브 시어터’의 선도적 작품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왔는지 실감케 한다.
‘슬립 노 모어’는 2000년대 초 영국에서 예술감독 펠릭스 바렛이 창립한 극집단 ‘펀치드렁크’의 대표작. ‘이머시브 시어터(몰입형 연극)’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이들은 무엇보다 관객이 객석에 앉아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대신 무대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이동하며 이야기를 ‘체험’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공연장은 특정 공간을 극의 배경으로 변형하는 형식을 취한다. 관객은 가면을 착용해 배우와 구분되는 동시에 몰입감을 높인다. 연극과 무용, 설치미술, 사운드 디자인을 결합한 전신적 경험으로 평가받으며 “감각 전체로 관객을 삼켜버리는 예술”이라는 찬사를 받아왔다. ‘슬립 노 모어’ 이후에도 ‘파우스트’, ‘더 드라운드 맨: 할리우드 페이블’, ‘더 번트 시티’ 등을 내놓으며 무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


‘슬립 노 모어’ 개막을 위해 방한한 펠릭스 바렛은 “단순한 공연이 아닌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환경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관객은 내러티브를 원하는 대로 따라가고 탐험을 떠날 수 있다. 여기에 정답이나 옳고 그름은 없다”고 설명했다. 무대 디자인을 맡은 피터 빌모트는 “대한극장은 배우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의 세계를 줬다”면서 “뉴욕과 상하이에서는 할 수 없었던 대담한 동선과 장면이 가능해졌다”고 강조했다.
역대급으로 조성된 몰입형 공간의 주인공은 맥베스, 레이디 맥베스를 필두로 다양한 배역을 맡은 23인의 배우들이다. 3시간 동안 각자 맡은 역할을 한 시간에 한 번씩 총 3회 선보인다. 관객은 100개가 넘는 장소를 직접 찾아다니며 자신만의 기승전결을 만들어야 한다. 둘이 손잡고 들어가도 여러 선택의 분기점에서 결국 홀로 돌아다니며 나만의 감상을 끝마친 후 극장 밖에서 만나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게 보통이다.
특유의 흰 마스크를 쓴 관객과 물리적 거리가 제로에 수렴하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카리스마를 분출하며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에서 장소로 관객을 이끌고 다닌다. 연출과 안무를 맡은 맥신 도일은 “언어가 아닌 몸과 감정으로 관객을 이끈다”며 “움직임과 퍼포먼스를 통해 야망과 광기, 죄책감 같은 정서를 전달한다”고 말했다. 주된 서사는 스코틀랜드 장군 맥베스의 운명. 마녀의 예언을 계기로 권력욕에 눈이 멀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과 주변을 파괴하는 과정인데 레이디 맥베스는 욕망의 도화선이자 파멸의 출발점이다.



체험의 절정은 주요 등장 인물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다. 눈빛과 표정, 그리고 몸짓으로 이뤄진 대화와 사건 전개 한가운데 서 있는 관객은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몰입감을 느끼게 된다. 공연 특성상 놓치는 장면이 많을 수밖에 없고 직접 목격한 장면도 어떤 맥락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때가 많으나 특별한 느낌은 충만한다. 한달여 기간 동안 이뤄진 프리뷰 중에도 이미 반복 관람을 하는 팬이 생겨났다고 하나 호불호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서울 퇴계로 212번지 매키탄 호텔(옛 대한극장)에서 폐막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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