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8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등 북한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점차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전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낸 ‘한·미를 자극하지 않는 축하연설’이 낮은 수준의 선제적 화해조치로 해석됐는데, 이에 이 대통령이 통큰 화답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대통령은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식’ 축사를 통해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인정하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특수관계”라고 짚은 뒤 “남북기본합의서에 담긴 이 정신은 6·15 공동선언, 10·4 선언, 판문점 선언, 9·19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남북 간 합의를 관통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기존 합의를 존중하며 가능한 사안을 바로 이행한다는 의지를 표명한 이 대통령은 ‘대북정책 3원칙’을 제시하며 남북관계 화해 기조를 재확인했다. “현재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할 뜻도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함으로써다.
◆‘선 신뢰’ 베팅 공식화, 9·19 군사합의 복원 수순
북한 관련 메시지에서 파격적이거나 새로운 대북 구상 및 조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정부 출범과 함께 추진된 전단 살포·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등의 조치를 향후 9·19 군사합의 복원 등으로 이어가며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계속할 것임을 시사했다고 풀이된다.
특히 9·19 군사합의의 선제적·단계적 복원을 언급함에 따라 접경지 일대에서의 군사훈련 중지 등 구체적 조치가 곧 단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포함해 윤석열정부 때 효력 정지된 군사합의 복원 절차가 본격화할지 주목된다.
문재인정부 때인 2018년 남북이 체결한 이 합의는 △육상 및 해상 완충구역 내 포사격 및 기동훈련 금지 △비행금지구역 설정 △JSA 비무장화 △남북공동 6·25 전사자 유해 발굴 △한강 하구의 평화적 이용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대통령의 이번 대북 메시지는 지난 3년간 적대적으로 멀어진 남북관계의 거리를 좁히되 당장 대화를 제안하거나 새 구상 발표는 자제하며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 의도로 분석된다. 협상에 전혀 응하지 않고 있는 북한에 재차 ‘당근’을 제시하며 믿음을 표한 것인데, 북한의 호응 조치 없이 지나친 후퇴가 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대화 분위기 조성과 신뢰 형성을 위한 9·19 군사합의 복원 등 선제적, 단계적 신뢰조치를 추진한다는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며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건설이라는 비전 하에 긴장 완화와 비핵평화를 통해 공존을 꾀하는 대북정책 구상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선 신뢰·대화, 후 비핵화’ 대북 기조를 공식화한 것으로, 추상적 폄화 담론이 아닌 구체적 조치들을 나열했다”며 “지난 정부의 강경 노선에서 탈피해 대화·화해 중심으로 전환을 암시한 것은 남북관계의 ‘리셋’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분단이 경제발전을 제약한다”고 지적한 점, “평화가 경제발전의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한 점으로 미뤄 여건이 조성될 경우 개성공단 재개나 철도 연결 같은 경제 프로젝트가 추진될 수 있음을 예고한 것으로도 평가했다.

◆北 호응 없이 화해 손짓…한국 소외 심해질수도
그러나 외교가에서는 “북측이 화답하길 기대한다”고 한 이 대통령의 바람에 북한이 바로 호응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임 교수는 예상되는 북한의 반응에 대해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8월14일 담화를 보면 이 대통령의 경축사가 북측 인식 변화나 정책 전환을 유도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고 관측했다.
먼저 이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특수관계’로 규정한 것부터 북한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2023년말 이미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남북관계를 규정한 바 있어, 이 대통령이 이를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낸 셈이 된다. 북한 체제 존중이나 과거 남북 합의 이행 역시 과거 방식의 남북관계 복원을 추진하는 개념이라 북한이 호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비핵화’를 언급한 대목에서 북한과의 대화는 멀어질 여지가 크다고 관측된다. 이 대통령은 “평화로운 한반도는 ‘핵 없는 한반도’이며 주변국과 우호적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한반도”라며 “비핵화는 단기에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어려운 과제이나, 남북·미북 대화와 국제사회 협력을 통해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국제사회를 향해 ‘핵보유국’ 인정을 요구하고, 미국에도 비핵화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 주장하면서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점점 더 강하게 가져가고 있다.
임 교수는 “러시아와 동맹 강화에 나서면서 북한은 남측을 ‘부차적 변수’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이 대통령이 일체의 적대행위를 할 뜻이 없다고 했지만 북한은 한·미 군사훈련, 첨단무기 확충 등을 언행불일치로 비판할 수 있고, 그 결과 한국 패싱(소외)은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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