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열정에도 외면 받은 삶 그려
몰락한 패자의 역사 조롱이 아닌
그 선택과 오류, 시대적 한계 통해
인간 나약함·권력 덧없음을 성찰
위대한 패배자/볼프 슈나이더/박종대 옮김/을유문화사/2만5000원
“승자는 역사를 쓰지만, 패자는 인간을 말해준다”고 한 저자가 인간의 패배 역사를 다룬 책이다. 정치, 문학, 과학,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다 좌초된 위인들의 삶이 펼쳐진다.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가졌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인물, 비열한 승자와 대비되는 아름다운 행적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살아갈 방향을 그리게 하는 위인 등 다양한 역사 속 인물의 실패기다.

러시아 출신 유대계 작가 이사크 바벨(1894~1940)은 ‘기병대’의 생생한 전쟁 묘사로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소비에트혁명 이후 등장한 신세계 질서의 한복판에서 펜을 들고 체제의 모순을 폭로한 ‘혁명 속의 증언자’였다. 저자는 바벨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 작가”로 정의한다. 전장에서 동료 병사들의 잔혹행위를 목격한 그는 이를 가감 없이 글로 남겼다. “적을 죽이기 전,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는 식의 묘사는 체제의 영웅담을 해치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당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정치적 미학이 강요되던 시기, 바벨의 사실주의는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바벨은 1939년 ‘반혁명 분자’로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1940년 총살됐다. 생전에 그가 남긴 “나는 침묵을 배웠다”는 비통한 자기 고백처럼, 그의 펜은 체제의 총탄 앞에 무력했다. 저자는 “그는 패배했지만, 침묵 속에서도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바티스타 독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했지만, 쿠바에 안주하는 삶을 꿈꾸지 않았다. 쿠바에서 권력을 잡은 후에도 그는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 정글로 향한다. 그곳에서 다시 소수 게릴라 대원과 함께 봉기를 시도하지만, 예전 쿠바와는 달리 민중은 그를 외면했다. 철저히 고립된 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된 직후 처형당했다.
게바라를 “세계를 혁명의 도화선으로 보던 낭만주의자”라 칭한 저자는 혁명이라는 이상이 현실정치의 냉혹함 앞에서 그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준다. “예로부터 영웅이 되려면 ‘실패와 요절’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하는데 게바라는 이 요건을 모두 충족시켰다”며 지금도 식지 않는 게바라의 인기 요인을 설명한다.
오늘날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남긴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는 생전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실패한 예술가’였다.
고흐는 처음부터 화가였던 것은 아니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전도사로 일하다, 가난한 탄광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충격을 받고 그림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구원을 표현하고자 결심한다.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초기 작품은 어둡고 거칠어 전문가들은 그를 조롱했고 평론가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1888년, 그는 프랑스 남부 아를에 정착해 ‘예술 공동체’를 꿈꾸었으나 폴 고갱과의 관계가 파탄나고 극심한 정신적 충돌 끝에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다. 정신병원 생활 속에서도 미친 듯이 붓을 들었다. ‘해바라기’, ‘밀밭이 있는 풍경’ ‘별이 빛나는 밤에’ 등 명작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를 인정해 준 이는 동생 테오뿐이었다. 37세에 고흐는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쏘고 생을 마감했다. 고흐가 죽고 수십년 후, 그의 그림은 미술 시장에서 수천만 달러에 거래되며 ‘천재 화가’로 추앙받는다. 생전에 철저히 외면당했던 그가 사후에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등극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들 외에도 영광의 절정에서 몰락한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워터게이트로 대통령직을 사임한 리처드 닉슨, 파시즘 창시자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한 베니토 무솔리니 등 12인의 인물을 탐구하며 그들이 왜 실패했는가에 주목한다. 책은 단순히 패자의 역사를 조롱하거나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과 오류, 시대적 한계 등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덧없는 권력의 본질을 성찰케 한다.
저자는 “운명은 우리에게 승리를 선사하기도 하고, 패배를 안겨 주기도 한다. 승패의 결과는 우리 손에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작고 아름다운 것을 꿈꿀지, 자기 욕심만 가득한 꿈을 좇을지, 무모해 보이지만 가치 있는 꿈을 따라갈지 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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