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각국에 보낸 ‘관세 통보 서한’으로 요동치는 국제 정세 속 미·일·중·러 등 한반도 주변 4강과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가 한자리에 모여 외교전에 나선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북한이 유일하게 참여하는 역내 다자안보 협의체로도 매년 관심을 받는데, 올해 북한은 25년 만에 처음으로 ARF 불참 가능성이 점쳐진다.

10일부터 이틀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아세안 회의에 한국은 외교부 장관 없이 박윤주 외교 1차관이 수석대표로 왔다. 박 차관은 한-아세안, 아세안+3(한중일),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한-메콩,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 잇따라 참석할 예정이다.
아세안은 미국에 지나치게 쏠린 한국 외교 지형의 다변화를 위해 적극 공략해야 할 대표 지역으로 꼽힌다. 이재명정부는 아세안 중시 정책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왔으며, 공급망·인공지능(AI)·문화·녹색전환 등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자는 메시지를 발신할 것으로 보인다. 또 한·미 정상회담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 관세·방위비 등 산적한 현안을 두고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과 박 차관이 짧은 만남이라도 가질지 주목된다.
트럼프 발 관세 전쟁에 대응하는 차원의 지역 협력 논의도 물밑에서 이뤄질 수 있다. 아세안 회원국 대다수가 미국으로부터 상호관세 부과 통보를 받은 상태다. 루비오 장관은 이번이 첫 아시아 방문인데, 아세안 외교장관들과의 첫 만남에서 불만을 달래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으로서는 한반도 평화 및 북핵문제 해결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포석도 있다. 한반도 주변 당사국인 미·일·중·러를 비롯해 EAS, 북한까지 회원인 ARF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비롯해 미얀마, 중동, 남중국해, 우크라이나 등 국제 정세와 지역 안보 현안에 대한 공방이 치열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ARF의 꽃으로 여겨지는 의장성명에 북핵문제 관련 메시지가 한국 입장을 얼마나 반영할지도 관심이다. 출범 초기부터 북한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한 신정부 정책 방향을 볼 때 올해엔 북한에 대한 규탄보다 평화 메시지에 방점이 찍힐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이곳에서 열리는 외교장관회의에는 조현 외교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임명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탓에 박 차관이 대신 참석한다. 이를 계기로 열리는 미·일·중·러 외교 수장과의 양자 회동에도 한계가 있을 전망이다.

한편, 2000년 ARF에 가입한 이래 처음으로 북한이 불참할 것으로 보여 배경이 주목된다. 회의를 하루 앞둔 10일까지 주최측과 북한 모두 북한 대표단의 참석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올해 의장국인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2017년 2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김정남 암살 사건 여파로 관계가 악화한 데 이어, 말레이시아의 북한인 사업가 문철명의 미국 신병 인도로 외교 관계가 단절됐다.
아세안에는 의장국과 외교 관계가 없으면 회원국이라도 회의에 초청하지 않는 관례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역시 아세안에서 다자외교로 얻을 것이 적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미 북한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2019년부터 작년까지 외무상 대신 ARF가 열리는 나라에 주재하는 대사나 주아세안대표부 대사를 수석대표로 보내왔다.
매년 ARF 의장성명 내용을 두고 한국과 기싸움을 하기도 했던 북한이 처음으로 아예 행사 자체를 불참한다면 그만큼 북한의 대외 환경·정책이 많이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러시아와 밀착하며 양자 외교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는 점에 무게가 실린다. ARF 직후인 11∼13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방북이 예정돼 있어 여기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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