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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알 수 없는 주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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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7-07 22:59:55 수정 : 2025-07-07 22: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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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너 누가 보냈니(상자는 대답할 수 없고) 다시 봐도 내 주전자(한 달 만에 뜯었다) 누가 왜 내게 보냈니(나는 내가 맞나) 발신인 자리에는 회사 이름만 있다(스와르미스 사랑에 빠지고 싶은 이름이야) 경품에 응모한 적이 있을까(나도 모르게 내가 나를)

 

물 마시고 정신 차리라고(그래 맞아) 차 한 잔 마시고 진정하라고(그래야지) 뜨겁다 차갑다 너는 좀 이상하다고(정말 그래) 말이 없는 주전자(주전자의 망상이야)

 

나는 내가 아니다(주전자라는 허구) 정말 그런가(내가 뜨겁게 태어나려고 해) 그래서 잠깐씩 지워지는 거라고(어디로 어디로) 펄펄 끓는 거라고(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물을 마시고 살아날까(물이 중요하지) 차를 마시면 따뜻해지지(매끈한 주전자 투명한 주전자) 나야 주전자(내가 나를 쏟았다) 끄덕끄덕 옳았다(불타오르는 이름들)

 

 가끔은 나도 내가 주전자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사물 같다. 불쑥 어색하고 낯설다. 차가운가 하면 곧장 뜨겁고 또 곧장 미지근하다. 이대로 펄펄 끓다 한순간 수증기가 되어 사라져 버릴 것도 같아 애꿎은 셔츠 깃만 만지작댄다. 참 알 수 없는 주전자, 혹은 사람. 그러고 보면 우리 집 현관에도 아직 뜯지 않은 봉투가 여럿인데. 누가 왜 보냈는지 알 수 없는 것들. 발신인보다 수신인 자리를 더 오래 들여다보면서 “‘나’라는 허구……” 중얼거린 적도 있다.

 주전자를 기울여 한 잔 물을 따르는 것으로, 그 물을 천천히 머금는 것으로 스스로를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는 건 늘 너무 복잡하고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자주 의심하게 된다. 실의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그런 때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를 쏟아야 하는 때. 어떤 식으로든 다 쏟아버리고 빈 주전자가 되어야만 하는 때가 있는 것 같다.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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