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 초년병 시절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을 출입하던 때 일이다. 1997년 말 15대 대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던 시기였다. 재경원 간부가 사석에서 “누가 되든 상관없다”며 “서랍 속에 좌파와 우파 정권에 맞춘 정책이 다 준비돼 있다”고 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료의 ‘영혼’이 도마 위에 오른다. 2008년 1월 이명박정부 인수위원회가 업무보고에서 노무현정부의 기자실 폐쇄 정책을 따지자 국정홍보처 한 간부가 “우리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라고 했다. “관료는 정부 철학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는 해명도 뒤따랐다. 이처럼 관료가 새 정권의 뜻에 따라 이전 정부의 정책을 뒤집는 건 다반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그저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직자가 되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통계기관이 정권 눈치를 보느라 집값 통계를 은폐·조작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이재명정부의 첫 내각 인선에서 유임됐다. 송 장관은 윤석열정부 시절 야당에서 주도했던 양곡관리법과 농수산물 가격안정법을 향해 농업을 망치는 ‘농망법’이라고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그제 국회에서 양곡법 개정안과 관련, “새 정부 철학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겠다”며 “개정안 기본 취지에는 동의해 왔다”고 돌변했다. 바람이 불기도 전에 드러눕는 풀잎과 다르지 않다. 야당은 “비겁하다”고 쏘아붙였고 여권과 농민단체 내에서도 반감과 반발이 만만치 않다. 관료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송 장관의 말 바꾸기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했는데, 의미가 다르다. 베버는 정부와 기업 등 대규모 조직의 복잡한 업무를 합리적·효율적으로 해결하는 이상적 모형으로 관료제를 제시했고 그 핵심요소로 사적 감정이 배제된 관료의 전문성을 꼽았다. “관료는 명예심이 없다면 부패와 속물근성에 물들게 된다”고도 했다. 헌법에도 공직자가 정권에 앞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적시돼 있다. 갈수록 국민의 공복 대신 정권의 하수인만 넘쳐나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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