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한 첩보 영화 ‘007시리즈’에서 배우 주디 덴치(91)는 영국의 대외정보기관 비밀정보부(MI6)의 여성 수장 ‘M’으로 등장한다. ‘골든 아이’(1995년)부터 ‘스카이폴’(2012년)까지 7편의 영화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상사를 맡아 어려운 임무를 지시하고 보고받는 역할을 한다. 본드와 함께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다. 하지만 현실 속 MI6에서는 남성 국장만 17명이었고, 여성 국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 속 ‘M’은 실제 영국 대내정보국(MI5) 최초의 여성 국장 스텔라 리밍턴을 모델로 했다.
여성이 첩보기관 수장이 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스라엘 모사드, 러시아 FSB(옛 KGB)에는 없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1기 때 임명된 지나 해스펠이 유일하다. 우리나라는 국가정보원장 하마평에도 여성이 오른 적이 없다. 그제 MI6이 116년 역사상 처음으로 차기 국장에 여성을 지명해 화제다. “어릴 적부터 늘 스파이를 꿈꿨다”는 블레이즈 메트러웰리(47)가 유리천장을 깬 주인공이다. 마침내 현실이 영화를 따라잡은 것이다.
중동과 유럽에서 주로 활동한 메트러웰리는 국장 지명 전까지 MI6의 기술·혁신 총괄책임자였다. 007 영화의 ‘Q’와 비슷하다. 병참 장교(Quartermaster)를 의미하는 영화 속 Q는 본드카와 폭탄 볼펜 같은 비밀 무기를 만들어 본드에게 제공하고, 해킹과 정보 분석으로 작전을 측면 지원하는 역할로 나온다. 메트러웰리는 이전 인터뷰에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영역’으로 대우받곤 했지만, 정보원들과 공통점을 찾아내는 등 여성으로서 유리한 점이 있었다”고 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메트러웰리 임명은 영국이 전례 없는 위협에 직면해 있는 시기에 이뤄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더타임스는 “MI6가 한때 모사드와 함께 세계 최고의 소규모 정보 수집 기관으로 평가받았지만, 정보통신본부(GCHQ)가 대량 정보를 수집하는 시대를 맞아 고전 중”이라고 평가했다. MI6의 수장은 내부적으로는 ‘C(Chief)’로 불리며 조직에서 신원이 공개되는 유일한 사람이다. ‘C’가 영화 속 ‘M’만큼 주목받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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