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마가 코앞으로 다가드니 하늘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안 그래도 비가 잦아 파란 하늘을 보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희뿌연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며칠 전에는 비바람이 혹독하게 몰아쳤다. 한낮인데도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을, 흠뻑 젖은 거리를 나는 오래 내려다보았다. 맞은편 건물 옥상에 떨어진 빗방울들이 사납게 튀어 올랐다. 까치 두 마리가 환풍기 아래 머리를 박고 앉아 비를 맞고 있었다. 저기보다 나은 곳이 있을 텐데. 나는 빗줄기가 새의 몸통을 후려칠 때마다, 서로를 밀어붙이듯 꽉 붙어있는 자그마한 몸이 바람에 주저앉을 때마다 생각했다. 비를 피할 좀 더 좋은 곳이 있을 텐데 왜 저기서 저러고 있을까. 예를 들면…. 나는 애꿎은 창문만 뽀득뽀득 문질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새들이 몸을 피할 만한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고층 건물로 꽉 채워진 도심 한복판, 거침없이 뻗어 나간 도로가 더 큰 도로와 맞물릴 뿐인 이곳에서 새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도로변 가로수조차 유난한 전지 작업으로 가지가 온통 잘려나가 앙상하고 빈약했다. 그러니 새들은 맨몸으로 비를 맞는 것 외에 도무지 방법이 없어 보였다.

비 맞는 일에 사람이라고 다를까. 나는 지난해 여름 조카가 찍었던 사진을 기억한다. 이례적인 강수량 때문에 지형이 낮은 지역들의 피해가 선연히 예측되던 시기였다. 조카는 학교가 끝난 뒤 학원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선 참이라고 했다. 길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며, 허벅지께까지 차오른 흙탕물을 찍은 사진에 나는 그야말로 식겁했다. 침수된 곳의 감전 사고와 흙탕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뚜껑 열린 맨홀 등등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른 피해야지 왜 거기서 사진을 찍고 있어!” 나는 그때도 그렇게 말했다. 이것 좀 봐, 라며 사진을 보냈던 언니가 대답했다. “비 온다고 쉴 수 있음 나도 좋겠다.”
프리랜서인 나와 달리 내 가족들은 전부 출근과 등교, 외근과 외출을 감행해야 했다. 고3인 조카는 모의고사를 앞둔 상태에서 학원의 총정리 강의를 듣기 위해 물에 잠긴 길을 가로질렀다. 가족 중 일부가 침수된 도로와 지하차도를 피해 내비게이션을 거듭 재설정해가며 차를 몰고 출근했다. 또 다른 가족과 친구는 운행이 중단된 지하철역 구간을 살펴 버스노선을 검색해 사무실로 향했다. 지금 이곳에서 바로 오늘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피해 있으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안전해야 하는 건 우리의 일상 그 자체다. 지난해 여름은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했고 많은 사람이 일상을 잃었다. 폭우와 폭염, 태풍과 해충 피해 예방을 위한 정책들을 찾아보며 거듭 생각한다. 안전한 일상 속에 살고 싶다는 당연한 욕망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새들은 어떻게 되나. 인간의 욕망은 나아갈 방향이 비교적 분명한데 비해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이 맨몸으로 비를 맞는 저 새들은. 우리와 똑같이 일상을 살고 싶을 뿐인데 끝의 끝까지 밀려나 흠뻑 젖고 멍든 새들은 또 어디를 향해 가야 하나. 지상으로 빼곡히 드리운 검은 빗발 사이로 작고 여린 몸들이 떨고 있다. 결국 장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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