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위기 등 제외 30년래 최저”
1·2차 추경 물가 영향 제한적 분석
“금리 낮추면 부동산 상승 우려 커
부양책 의존 말고 구조개혁 병행”
대외 불확실성에 금리인하 신중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현 경제상황에 대해 “매우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만큼 경기부양 정책이 시급해졌다”고 진단했다. 이 총재가 경기부양책의 조속한 집행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은은 추가경정예산(추경)의 신속한 집행이 필요하다는 입장도 내놨다.

이 총재는 이날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창립 제75주년 기념식에서 “올해 예상되는 성장률은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위기를 제외하고는 지난 30년간 가장 낮은 수준이고, 불과 3개월 만에 연간 성장률 전망치를 0.7%포인트나 낮춘 것 역시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달 한은은 올해 성장률 전망을 1.5%에서 0.8%로 하향 조정하고, 내년 성장률도 1.8%에서 1.6%로 낮춘 바 있다.
이 총재는 “한은은 지난해 10월 이후 네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등 경제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앞으로도 당분간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경기부양을 위한 추경 집행에 대해서도 한은은 “내수침체에 대응해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실집행률을 높이는 것이 긴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조국혁신당 차규근 의원이 ‘최소 20조원 이상의 추경 편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입장’을 묻는 서면 질의에 대한 답변이다.
1·2차 추경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은은 “최근 성장세가 크게 약화해 있는 데다가 정부 지출은 물가에 시차를 두고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할 때 13조8000억원 규모의 1차 추경이 올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2차 추경도 최근 논의되고 있는 규모라면 올해 물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봤다. 한은은 다만 “1·2차 추경 효과를 함께 고려할 경우 내년 물가상승률에 소폭 상방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구체적 추경 규모에 대해서는 “경제 상황이나 재정 여건 등을 고려해 국회와 정부가 협의해 결정할 사항”이라며 말을 아꼈다. 앞서 이 총재는 1차 추경 편성 전인 지난 2월18일 국회에서 “추경을 15조~20조원 규모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재 정치권은 최소 20조원 이상의 추경 편성을 논의 중이다.
다만, 이 총재는 경기부양책에만 의존하지 말고 성장잠재력의 지속적인 하락을 막기 위한 구조개혁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은에 따르면 2000년대 중후반만 해도 4% 수준이었던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저출생·고령화로 지금은 2%를 밑도는 수준까지 하락했다. 또 높은 수출 의존도로 인해 경기 변동폭이 커지면서 분기별 역성장할 확률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5% 수준에서 지난해 약 14%로 3배 커졌다.
실제로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중반까지 분기별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건 2008년 4분기(-3.4%)뿐이다. 하지만 출생아 수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한 2015년 이후로는 2017년 4분기(-0.2%), 2020년 1분기(-1.3%)와 2분기(-2.7%), 2022년 4분기(-0.5%), 2024년 2분기(-0.2%)에 이어 올해 1분기(-0.2%)까지 이미 6차례에 달한다.

이 총재는 “급하다고 경기부양 정책에만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사후적으로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기준금리를 과도하게 낮추면 실물경기 회복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경고했다. 지난 3월 이후 서울 아파트 가격이 연율 기준 약 7% 상승하고 지난달 금융권 가계대출은 6조원 늘어나는 등 증가세도 확대되고 있다. 이 총재는 “손쉽게 경기를 부양하려고 부동산 과잉 투자를 용인해 온 과거의 관행을 떨쳐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 중반 수준으로 낮아졌지만, 미국의 금리인하 속도 조절에 따라 내외 금리 차가 더 커질 수 있고 무역 협상 결과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도 커서 외환시장 변동성이 다시 확대될 수 있다”면서 금리 인하를 신중히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새 정부를 향해서는 “충분한 조율과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좋은 정책이라도 이해집단의 저항에 부딪혀 좌초될 수밖에 없다”면서 “구조개혁 과제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리더십을 발휘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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