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환 전 대법관이 2016년 쓴 ‘대법원 상고사건 처리의 실제 모습과 문제점’ 논문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박 전 대법관은 문재인정부 때 대법원장 제안을 여러차례 받고도 고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판사시절 활동한 ‘우리법 연구회’의 초대 회장이자, 대법관 시절 다양한 진보·개혁 성향의 소수 의견을 낸 ‘독수리 5남매’ 중 한명입니다.

박 전 대법관은 이 논문에서 우리 대법원 상고사건 처리의 근본적 문제로 ①대법원에서 처리하는 상고사건 숫자가 너무 많은 점 ②전원합의체 중심으로 운영되지 않는 점을 꼽았습니다.
박 전 대법관은 대법관 증원과 관련해 연간 4만건이 넘는 상고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아마도 수백명의 대법관이 있어야 할 것”이라며 “이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조치”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상고제한을 통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상고사건 수를 제한하고, 선별될 모든 사건을 전원합의체에서 처리하되, 주심제도가 아닌 대법관 전원이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심도 있는 법리논쟁을 벌여 결론을 내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대법원이 최고법원으로서 수행하는 권리구제 기능과 정책법원의 기능 중에서 후자의 기능은 다른 기관이나 하급심 법원이 대신할 수 없는 대법원만이 유일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이며, 나라 전체의 기능 중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기능이다. 그에 걸맞은 소수의 사건이 선별되고 대법관들의 경험과 지혜가 심도 있는 연구와 검토를 거쳐 토론과 판결문의 법리전개 과정에 녹아들 수 있는 전원합의체 운영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정책법원의 기능이란 단순한 분쟁 해결 기관을 넘어, 사회적·제도적 방향을 제시하는 법 해석의 최고 기준점으로서 역할하는 법원을 뜻합니다. 박 전 대법관은 “실질적 법리논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원합의체 구성원의 숫자가 토론이 가능한 숫자인 10명 내외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언급합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현재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구성원 숫자 13명도 약간 많은 느낌이 들고, 전원합의 도중에 토론이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돌아가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대법관 수가 늘어나면 소부 재판이 많아져 권리구제 기능은 강화할 수 있지만, 최고 법원으로서의 통일적 법 해석이나 사회적 방향 제시와 같은 정책법원 기능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주심대법관 1명에 의해 사건 처리 방향이 결정되는 소부 재판은 “대법원 재판을 주심대법관의 단독재판과 비슷하게 변질시켜서 대법관의 경륜과 지혜가 녹아들어간 법창조적인 기능을 발휘하기보다는 기존 법리의 잣대로 사건을 처리해 내는 기능”에 머물게 된다고 박 전 대법관은 우려했습니다.

민주당 박균택 의원은 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1소위 회의에서 대법관 증원법(법원조직법)에 대한 속도조절론이 제기되자 “대법관이 30명 됐을 때 전원합의체를 한꺼번에 운영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새로운 제도개선을 통해서 보완을 하면 된다. 졸속적인 처리는 결코 아니다”고 반박했습니다. 일단 대법관 증원법을 처리한 뒤 추후 문제점을 보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장점에서 옷 한벌을 맞출 때에도 재단사가 신체 부위별 치수를 정확히 잰 뒤에 가봉하는 일련의 작업을 거칩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법관 증원 논의는 이러한 과정이 전부 생략된 채 옷 먼저 만들테니 몸을 맞추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법관 증원은 박 전 대법관이 지적한 전원합의체 심리 장애 이외에도 여러 검토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만해도 장관급인 대법관을 현재의 두배 이상인 30명으로 늘리면 당장 개별 대법관들의 집무실 공간, 부속실 직원 인력, 차량 등의 지원 예산이 지금의 두배 이상으로 필요합니다. 대법원 청사 공간이 부족해 증축이나 이전을 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지금보다 두배 가량이 필요합니다. 현재 대법원에서 근무하는 재판연구관은 법관 101명, 비법관 30명으로 총 131명입니다. 재판연구관은 보통 경력 14년차 정도의 판사들이 차출되는 데, 대법관별 전속 재판연구관을 비롯한 재판연구관을 지금보다 두배 가량 늘릴 경우 가뜩이나 판사 수가 부족한 하급심 재판에 구멍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대법원이 상고심 사건을 보다 충실하게 심리할 수 있도록 상고심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 자체에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대법원은 전임 대법원장 때 상고심사제 도입 및 6년에 걸쳐 대법관 4명을 증원하는 입법의견을 낸 바 있습니다). 국민을 위해 대법원을 개편한다는 민주당 주장이 진정성을 담보하려면 ①적절한 대법관 증원 규모에 대한 체계적 검토 ②상고허가제를 비롯한 새로운 상고심 제도 설계 ③상고 건수를 줄이기 위한 하급심 강화 ④관련 비용 추계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검토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30년 가까이 재판 실무와 사법행정을 경험한 A부장판사는 “상고심 처리 지연이라는 복잡하게 얽힌 문제에 대해 대법관 30명 증원이란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부족이거나 거짓말”이라며 “전체 판사와 직원 수 등 전체 법원 인력규모와 시설이 늘지 않는 한 아랫돌을 위에 놓든, 윗돌을 아래에 놓든 모두 한시적 눈속임인 미봉책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한정된 국가 예산에서 상고심을 비롯해 사실심인 1·2심 충실화 등 전체 사법시스템 강화에 얼마만큼의 자원을 투입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수반돼야 합니다. 이는 행정부와 입법부, 나아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이러한 논의는 쏙 빼놓은 채 대법관 30명 증원만을 무턱대고 밀어붙인다면, 결국 국민들에게 보복성 내지 사법부 장악 의도라는 의심만 받게 되지 않을까요. 대법원이 법치주의 보루로 남기 위해선 숫자보다 구조, 구조보다는 최고법원의 역할에 대한 사법철학이 먼저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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