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장군이 맡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군 대표’ 직위, 국방정책과 전략의 정점, 예비역 장군이 올라설 수 있는 으뜸가는 자리…. 한국 국방부 장관을 설명하는 대표적 수식어다.
50만명에 달하는 한국군을 관장하는 국방부 장관은 수십년간 장군 출신들이 독점해온 ‘성역’이었다. 윤석열 정부에서 계엄을 주도한 김용현 전 장관을 포함해 50명의 역대 장관 중 민간인 출신은 5명에 그쳤을 정도다.

철옹성같던 예비역의 ‘성역’이 12·3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흔들리고 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민간인 출신 국방부 장관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26일 차기 정부 출범 시 ‘민간인 출신 국방부장관 임명’을 공언했다.
또다른 계엄 사태를 막고자 문민통제를 강화하고 군의 적폐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다.
비(非)군인 출신 국방부 장관 임명은 군사 문제에 치우쳐 있던 국방부가 국가안보와 민주 헌정 질서 수호라는 두 가지 임무를 함께 수행함으로써 국방부의 근본적 존재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래 미완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국방문민화가 진정으로 실현될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문민통제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자유와 안보.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지닌 핵심 가치지만, 자유와 안보를 함께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라를 지키려면 강력한 군대가 필요한데, 군대가 강해지면 독재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문민통제 원칙은 이에 대한 해법이다. 국민이 선출한 문민 리더십이 국민을 대표해 군을 통제하고, 국방문민화를 실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군에 대한 문민통제 원칙과 규정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도 문민통제에 맞는 법적·정책적 장치들을 갖춰왔다.
헌법에 현역 군인을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에 임명할 수 없도록 했다. 국방부 조직도 구성해 군 통수권자가 행정부를 통해 군을 통제토록 했다.
참여정부 시절부터 현역 군인 위주였던 국방부 구조를 민간인 중심으로 개편했다. 표면적으론 문민통제 정신을 승계하는 셈이다.
하지만 ‘군사 문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문민통제 대원칙은 실현되지 않았다. 모든 국방정책 구성·집행을 관장하는 국방부의 정점에 있는 장관이 군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선 ‘문민장관=안보불안’이란 인식이 뿌리 깊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1952년 국방부 장관을 자유당 정치인이었던 이기붕이 맡았는데도 “북한 위협을 막으려면 군출신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앞섰다.
1953년 정전협정 이래로 한반도는 남북간 군사적 대치 국면을 이어왔다.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안보 불안 속에서 위기관리가 강조됐고, 군사적 경험이 부족한 문민 출신은 국방부 장관을 맡기에는 불안하다는 인식이 굳어졌다.
5·16 쿠데타 직후 군출신 국방부 장관 체제가 60여년간 이어지며 합참의장이나 참모총장으로 근무하다 오전에 전역하고 오후에 장관이 되는 일도 있었다.
문민통제 원칙이 근본적 원칙 대신 기능적 성격으로 축소됐고, 국방부 장관이 합참의장과 참모총장 위에 있는 사실상의 상관처럼 되어버렸다.
국방부 기획조정실을 능가하는 실세부서로 불리며 장관의 군령·군정권 행사를 보좌하는 국방정책실의 실장도 참여정부 시절 전제국 실장을 제외하면 현역·예비역이 도맡았다.
이는 국방부가 행정부의 정책부서가 아닌 군사 업무를 수행하는 각 군 본부의 상급 기관 성격이 뚜렷해지는 결과로 이어졌고,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군대에 여러 인연이 있는 장군 출신 국방부 장관 체제에서 장군 인사를 앞둘때마다 군 내부에선 눈치 보기와 경쟁이 과도하게 벌어졌고, 특정 인맥이 우대받는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장관이 대북 군사대응에 몰두하면서 국방 경영은 민간 분야보다 발전이 늦어졌다.

국방 경영은 북한 위협에 맞설 군대에 제공할 병력과 물자를 획득·유지하는 양병(養兵)이다. 행정부의 정책부서인 국방부를 대표하는 장관이 주도해야 하는 부분이다. 군대를 운용하는 용병(用兵)은 합참의 몫이다.
그런데 장군 출신 장관이 작전을 비롯한 대북 군사적 대응을 우선하면서 예산·인사·조직 관리 체계 등의 발전 속도는 민간을 따라잡지 못하게 됐다. 주객이 전도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일각에선 차관이 분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국방부 조직은 장관이 모든 정책의 정점에 있다. 업무 범위가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다.
그런 환경에서 국방부 장관이 제한된 임기 동안 합참이 주도할 대북 군사대응에 몰두하면, 국방 경영은 제한된 임기 내 성과를 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는 국방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대북 군사대비태세나 한미 연합작전 등은 합참을 중심으로 하는 군 수뇌부가 맡고, 국방부 장관은 현역 군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정치·경제·안보적 사고에 기반한 고차원적 전략과 개념, 철학을 적용해 국방 경영과 혁신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전문성 외면하면 문민화도 불가능
국방부 장관이 반드시 군사작전에 정통한 군출신일 필요는 없다. 군 수뇌부의 조언을 받거나 위임을 하는 방법이 있다.
헌법과 국군조직법에 따르면, 국방부 장관은 합참의장을 통해 군령권을 행사하고 각군 참모총장을 통해 군정권을 행사한다.

군사작전과 군대를 유지·관리하는 것에 대해선 최고로 인정받는 전문가들이 수뇌부에 포진하고 있다. 이들의 조언을 받으면, 문민 국방부 장관도 충분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현역 군인이 고도의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출신이나 정치적 고려보다는 능력과 도덕성을 우선하는 군 수뇌부 인사가 이뤄져야 한다.
한국군을 대표하는 군 수뇌부이자 작전 지휘를 담당하는 합참의장을 임명할 때, 지휘 역량보다 정부의 정책 의지나 정치적 고려가 더 강조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합참 근무경험이 거의 없는데도 합참의장에 임명되는 사례가 종종 나왔다.
윤석열정부 시절에도 장군 인사를 놓고 “깜도 안되는 사람을 왜 진급시키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고, 특정 그룹에 편중됐다는 논란도 제기됐다.
이같은 문제는 유사시 민간인 국방부 장관과 군 수뇌부에 치명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최근 전장은 정보의 수집과 유통이 빨라지면서 의사결정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의사결정에 주어지는 시간은 전술적 단위에선 5분, 작전적 수준에선 30분에 불과하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감시정찰자산은 방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정보는 인공지능(AI)에 의해 실시간 정리되어 C4I 체계를 통해 지휘부에 시시각각 전달된다. 5~30분 단위로 정확하고도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순간의 주저함으로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사태를 방지하려면, 민간인 국방부 장관 주변에 고도의 전문성과 풍부한 경험을 갖춘 군 수뇌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르고 빠른 결정을 할 수 있다.
국방부와 각 군의 모든 부서·직급에 대한 인사 방식도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적재적소 배치는 인사의 으뜸가는 원칙이지만, 군 조직에선 신분·군·병과·특기에 따라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보직을 받아도 칸막이에 막혀 핵심 업무에 접근하지 못한 채 조직에서 겉돌기도 한다.
이는 국방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민간인 국방부 장관이 전문적 조언이나 지원을 받기 어렵게 한다.

민간인 국방부 장관을 필두로 국방문민화를 단행해도 국방은 문민 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문민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변수다. 국방부와 합동부대는 민간인과 현역 군인이 유기적으로 협업하면서 합리적 기준에 따라 분업을 하는 구조를 갖춰야 대응할 수 있다.
문민화 비율이나 육·해·공군 비율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거나 관례를 추종하는 대신 ‘국방의 효율성’을 기준으로 민군 또는 3군 공통직위를 확대하는 등의 인사 개편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력 풀을 최대한 많이 확보할 수 있다.
합참을 전투 지휘와 전략 수립에 집중토록 하고, 무기체계 소요 관련 업무나 시험평가는 국방부로 이관해서 용병(用兵)은 합참, 양병(養兵)은 국방부와 각 군 본부가 맡도록 업무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군에 대한 문민통제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통제의 대상인 군이 문민통제를 스스로 지키고 정치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얀마처럼 군이 무력을 앞세워 민주헌정질서를 무너뜨리려고 결심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

민간인 국방부 장관 임명은 군이 문민통제를 스스로 지키는, 진정한 의미의 문민통제를 구현하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그 시작이 성공하려면, 군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군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민간인과 군인이 효율적으로 분업·협업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국방문민화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