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전통 수공예품 수집한 이행자
제주에 순응하는 ‘전통과 현대’ 주제로
日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에 설계 의뢰
통창으로 보이는 군산오름 풍경 압권
신발 벗고 들어가는 일상적 행위 유도
마치 개인 취향 담긴 집에 초대받은 듯
최근 흥미롭게 본 유튜브 콘텐츠가 있다. 가수이자 작곡가인 정재형의 ‘요정식탁’이다. 정재형은 집으로 지인들을 초대해 손님의 입맛에 맞고 자신의 취향이 담긴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집이라는 편안함과 식사라는 매개체는 초대 손님들의 경계를 허문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은 여느 토크쇼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고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평소 손님 초대에 익숙하지 않고 타인에게 선뜻 내놓을 만한 음식 솜씨조차 없는 내게 ‘요정식탁’은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고려디자인 고문이자 현대종합목재 상무이사였던 이행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손님을 초대해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고자 했다. 30년간 전통 수공예품을 수집해 오면서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 전통과 근원에 있다고 믿게 된 그는 이런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고 나누기 위해 박물관을 짓기로 했다.

설계는 일본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에게 맡겼다. 안도 다다오는 책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안그라픽스)’에서 ‘전통’은 “눈에 보이는 꼴이 아니라 그 꼴을 지탱하는 정신”이고 전통의 계승은 “그 꼴을 지탱하는 정신을 건져 올려 현대에 살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박물관 건립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등을 겪으면서 당초 서울로 예정됐던 부지가 제주로 변경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본격적인 설계는 첫 의뢰를 받은 후 대략 12년이 지난 2009년에 시작되었지만, 그 시간 동안 의뢰인과 건축가 사이의 교감은 더 깊어졌다. 이행자는 건축가에게 박물관에 담길 전통 가구나 수공예품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안도 다다오는 소반 이야기에서 설계의 실마리를 찾았다. 두 사람은 옛것이 지금보다 더 세련되고 현대적이라는 데 공감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안도 다다오는 “제주도라는 땅에 순응하는 전통과 현대”라는 개념으로 박물관을 설계했고 이행자는 “본디의 모습을 탐색하는 아름다운 문화 공간”이라는 뜻을 지닌 ‘본태(本態)박물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2012년 준공 당시 박물관은 전통공예관(제1관)과 현대미술관(제2관),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본태샵’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후 건물(제3관~제5관) 하나가 추가됐다. 흥미로운 점은 제2관 2층에 전시된 박물관 모형에서는 본태샵 건물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본태샵에는 매표소가 있어 관람객들이 가장 먼저 들를 수밖에 없는데,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통창을 통해 군산오름의 풍경을 보게 된다.

군산오름은 본태박물관 남서쪽으로 6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양쪽으로 펼쳐진 두 봉우리가 마치 군대 막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태박물관에서 군산오름은 ‘스펙터클(spectacle)’을 담당한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에서 스펙터클은 건축물의 인상을 결정하는 압도적 장면이다. 연재에서 다룬 그의 건축물을 예로 들면 LG아트센터(제3화)에서는 한쪽 끝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타원형 터널, 원주의 뮤지엄 산(제30화)에서는 수면에 비친 장면이 스펙터클에 해당한다. 그런데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에서 스펙터클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고 정교하게 의도한 단계와 과정(시퀀스; sequence) 속에서 등장한다. 이때 그의 또 다른 시그니처(signature)인 ‘건축적 산책로’가 활용된다.
본태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곳에서는 건축적 산책로를 따라 박물관을 유영하다 다리를 건너는 지점에서 군산오름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전통 담장과 물 사이로 난 통로를 걷다 제1관으로 들어서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 순간에 보인다. 두 번째는 제2관 안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서 보이는 펼쳐진 풍경 속에 있다.
안도 다다오가 본태박물관의 건축적 산책로 중 이 두 지점에서만 군산오름이 보이도록 한 이유는 다리를 건너는 행위가 갖는 상징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리를 건너는 이유는 이쪽 공간·세계에서 저쪽 공간·세계로 가기 위해서다. 지형적으로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섬’이다. 특히, 제주도는 이국적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져 뭍과는 다른 세상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연예인들이 제주에서 평범한 삶을 찾으려 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한 달 살기’ 열풍이 제주에서 시작된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안도 다다오는 본태박물관에서 다리를 건널 때, 제주라는 섬으로 건너가는 함축적 의미와 함께 군산오름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현재는 많은 관람객이 본태샵에서 군산오름을 미리 접한다. 그래서 그다음에 보이는 군산오름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박물관장의 취향이 담긴 집에 초대받았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는 곳은 제2관이다. 일단 이곳에 들어서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솔직히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박물관에서 신발을 벗는 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안도 다다오는 집에서만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이곳을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개인적인 취향이 담긴 ‘집’처럼 인식하게 만들고자 했다.
안도 다다오는 제2관의 공간을 구성하면서 자신이 1976년에 설계한 ‘스미요시 연립주택’을 차용했다. 일종의 셀프 오마주인데, 스미요시 연립주택은 주거 공간에 대한 당시의 통념을 깨는 파격적 시도로 화제를 모으면서 그를 주목받게 했다. 특히, 양쪽으로 방을 두고 이 둘을 연결하는 다리와 하늘로 열린 중정을 배치한 설계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자연과 교감하는 삶의 가치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본태박물관에서는 전시시설이라는 점을 고려해 중정 부분을 실내로 바꾸었다.
다리를 건넌 건축적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미로 같은 통로와 ‘명상의 방’이 있다. 이행자가 제주도에 애정을 지닌 안도 다다오에게 언제든지 와서 명상하라는 마음으로 마련한 공간이라고 한다. 전통의 아름다움을 전한다는 박물관의 건립 목적 때문인지 명상의 방 안에는 창호지를 바른 벽으로 둘러싸인 전통 한옥 양식의 방과 보자기를 연상시키는 창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불투명한 유리로 밖을 볼 수는 없어서 한옥에서 중시하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주변 풍경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법(차경; 借景)은 느낄 수 없다.
취향을 공유하려면 받아들이는 사람을 세밀하게 고려한 잘 만들어진 방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본태박물관은 지은이의 진심이 담긴 초대와 제주의 풍토를 담아내고자 한 건축가의 노력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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