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뮤지컬기획사 설립 흥행몰이
삼성영상사업단과 손잡고 본격 도약
저작권 계약 맺은 첫 뮤지컬 국내 도입
앞선 공연 관리 시스템의 힘
주먹구구로 표만 팔던 국내 공연계에
데이터 기반한 티켓모니터링 선보여
표준계약서 등도 도입 산업 기초 세워
성장 기폭제 된 ‘오페라의 유령’
브로드웨이서 공연중이던 작품 계약
2001년 초연 이후 누적 관객 150만명
이후 ‘캣츠’ ‘라이언 킹’ 등 공연 잇따라
코로나도 극복한 ‘창작사’
태풍 매미·메르스 등 겪으며 숱한 위기
코로나도 철저한 방역 뚝심으로 버텨
국내 제작사 ‘알앤디웍스’도 후방 지원
뮤지컬이 국내 문화산업 핵심으로 떠올랐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벗어난 후 급성장을 거듭하더니 매출 규모가 영화보다 덩치가 커졌다. 해외로도 확장해 K뮤지컬이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있다. K뮤지컬의 이 같은 성과는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은 클립서비스 설도권 대표와 친형 설도윤 에스앤코 예술총감독(전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을 빼놓으면 설명하기 어렵다. 국내 공연계에 해적판이 난무하던 당시 설 대표 형제는 정식 계약한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선진 제작 시스템을 처음 들여와서 뮤지컬 제작의 ABC를 전파했다.
이후 ‘오페라의 유령’을 시작으로 ‘캣츠’, ‘라이언 킹’, ‘위키드’ 등 블록버스터급 뮤지컬을 선보이며 국내 뮤지컬 시장 성장을 견인한 인물이다. 공연 예술 기초 인프라인 티켓 판매 모니터링 시스템을 처음 만들었고 철저한 시장 분석과 기획을 뮤지컬 시장에 도입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클립서비스 본사에서 만난 설 대표에게 ‘철저한 흥행사’라는 수식어를 제안하자 고개를 저었다. “흥행은 요행이 아니라 설계입니다. 철저히 시장을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흥행사’라기보다는 ‘흥행의 기획자’라고 생각합니다.”

◆“흥행은 요행이 아닌 설계”
설 대표는 대학을 졸업(1988)하면 대기업이 정답이던 시대에 곧장 공연산업에 뛰어들었다. 사연을 묻자 지금은 사라진 증권사 객장을 드나들던 대학 시절 기억부터 끄집어냈다. “자본주의가 꽃피던 시대였죠. 대학 때는 음악(성악) 하던 형님 피아노를 처분한 돈까지 보태서 혼자 증권사 명동 객장에 가 시황판을 보며 주식투자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던 대로 포항제철을 갈까. 당시 시대의 총아였던 대홍기획을 갈까 고민도 했지만 모은 돈으로 작은 녹음실을 꾸며 독립음반을 내는 사업을 한 거죠. 음악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 등이 작용했어요.”
그렇게 연습실 겸 스튜디오까지 차린 기획사는 숱한 가수와 인연을 맺으며 음반을 냈으나 부침 끝에 1994년 부도를 냈다. 형제는 다시 자금을 모아 이듬해 뮤지컬기획사를 설립했고 첫 작품으로 지금도 공연되는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선보였다. 이 작품 흥행몰이를 눈여겨본 곳이 지금은 전설이 되다시피 한 삼성영상사업단이다. 설 대표는 “당시 문화산업 분야는 전근대적이었는데 삼성영상사업단이 진입하면서 모든 걸 획기적으로 바꿨다”며 “영화제작, 음반제작 유통 배급 모든 영역에서 모인 인재들이 사업단에서 시장 질서를 재편하고 새로운 상품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설도윤씨가 지인들과 함께 만든 창작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로 한창 흥행몰이를 할 때였죠. 그 성공을 보고 삼성영상사업단에서 뮤지컬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함께 브로드웨이에 가서 계약한 것이 ‘브로드웨이 42번가’였습니다.”

삼성영상사업단이 설립한 뮤지컬제작사 T&S컴퍼니에서 설도윤 대표·설도권 기획실장이 만든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여러 진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저작권 계약을 맺고 들여온 뮤지컬이다. 제작비 28억원을 투입했는데 최종 3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당시 뮤지컬 시장 총 규모가 20억~30억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특히 미국 뮤지컬 전문 제작진 10여명이 2개월간 서울에 머무르면서 한국 스태프에게 여러 노하우를 전수했다. 하이라이트인 탭댄스 장면을 위해 미국에서 현지 무용수를 선발해 데려왔을 정도. 공연 기간(40일)도 당시로선 이례적인 장기 공연이었다.
“당시 브로드웨이에서 한국은 라이선스 없이 카피하는 나라로 봤어요. 삼성영상사업단이 그 인식을 깼습니다. 수익보다 최고의 무대를 만들자는 목표로 돈을 아끼지 않고 최고의 투어 스태프를 데리고 와서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삼성 사장단이 무대를 본다는 각오를 가지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야 했죠. 든든한 모기업이 있으니 표 파는 건 걱정도 안 했어요.”
삼성영상사업단은 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며 사라졌다. 하지만 이렇게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만들면서 뮤지컬 제작 노하우를 습득한 인력과 그 시스템은 훗날 다른 제작사, 공연장, 투자회사에 자리 잡으며 현재 뮤지컬 산업의 기반이 됐다.

◆티켓모니터링·투명회계·표준계약서의 힘
이즈음 설 대표는 현재 뮤지컬 산업의 또 다른 인프라가 된 티켓모니터링시스템을 만들게 된다.
“그때는 엑셀도 없었습니다. ‘훈민정음(옛 문서작성프로그램)’에서 좌석 정보표를 만들어 계산했어요. 표준화된 양식을 만들어 경영진에게 보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죠.”
날짜, 회차, 좌석 상태, 티켓 가격 등 모든 정보를 하나의 표로 깔끔하게 정리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화했다는 의미다. 단순히 티켓을 파는 것에서 벗어나, 데이터 기반으로 공연 매출을 관리하고 예측하는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해외 공연업계에서도 보기 드문 아이디어였고 이후 클립서비스 창업 및 데이터 기반 경영으로 발전했다. 설 대표는 “그전에는 공연이 얼마나 팔렸는지 감으로만 파악했다. 하지만 티켓 판매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흥행 전략이 훨씬 정교해졌다”고 설명했다.
이 시스템은 2000년 토털 마케팅 시스템을 제공한다는 기치를 내 건 클립서비스 창립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맨땅에 헤딩해야 했어요. 단순히 광고로 자발적 수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뛰어다니며 관객을 모았죠. 프로모션, 홍보, 기업 세일즈까지 직접 해야 했습니다. 그게 클립서비스가 시작된 이유였어요. 티켓 판매량에 따른 광고 전략, 관객 분석을 통한 타깃 마케팅, 모든 것이 데이터로 관리됐습니다. 이를 통해 공연 흥행 가능성을 철저히 예측할 수 있게 됐죠.”
투명한 회계는 계약 시스템의 혁신으로도 이어졌다. “예전엔 출연료가 구두 계약이었어요. ‘오늘 출연하고 30만원 받아.’ 하지만 우리는 모든 걸 서면으로 정리했고, 쌍방이 윈윈할 수 있는 표준계약서를 만들었습니다. 한국 공연산업에서 계약 시스템의 기초를 세운 셈이죠.”

◆뮤지컬 성장 기폭제가 된 ‘오페라의 유령’
체계화된 공연 기획·관리 시스템은 이후 뮤지컬산업 성장의 또 다른 기폭제가 된 ‘오페라의 유령’을 국내 공연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처음 계약을 성사시킬 때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외국 원작사에게 한국 시장은 ‘검증되지 않은 시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철저히 데이터를 준비했고, 매출 예측부터 티켓 관리 시스템까지 보여주며 설득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면 안전하게 흥행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죠.”
2001년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초연한 ‘오페라의 유령’은 7개월 동안 장기 공연을 하며 24만명 관객을 동원, 200억원을 벌어들였다. 이후 2023년 4월에 누적 관객 150만명을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우며 뮤지컬 시장을 크게 넓혔다. “이전 작품들이 ‘라이브러리(창고)’에 들어가 있던 작품이라면 ‘오페라의 유령’은 브로드웨이에서도 ‘온 스테이지(현역)’, 그것도 정상의 작품이었습니다. 가져오는 건 쉽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티켓 판매 시스템을 보여주며 투명성을 입증했습니다. ‘오늘 몇장 팔렸고, 매출은 얼마이며, 로열티는 이만큼’까지 정확히 보여줬죠.”
이 성공을 기반으로 설 대표는 ‘캣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라이언 킹’, ‘위키드’, ‘알라딘’ 등 세계적인 뮤지컬을 차례로 선보였다. 블록버스터급 뮤지컬을 다수 보유했던 영국의 RUG, 미국 디즈니와 오랜 협업으로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클립서비스는 태생이 창작사”
위기도 적지 않았다. 흥행 부진을 늘 걱정해야 하는 그에게 코로나19 사태 때 경험을 묻자 “그 이전에 태풍 매미, 메르스, 사스가 있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2003년 부산 해운대에 대형 텐트 극장을 세우고 ‘캣츠’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매미가 상륙했어요. 초속 50m 강풍에 텐트가 찢기고, 무대 장비가 모조리 망가졌습니다. 피해액은 65억원. 보험으로는 18억원밖에 보상받지 못했죠.” 자연재해뿐 아니라 전염병도 클립서비스를 위협했다. 사스, 메르스를 거쳐 코로나19 팬데믹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다. “코로나19는 공연산업에 엄청난 타격을 줬습니다. 그러나 중단할 수 없었어요. 이미 계약된 공연들은 매몰 비용이 너무 컸고,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강행할 수밖에 없었죠.” 전 세계 극장들이 문 닫던 시절에도 설 대표는 철저한 방역 안전 대책을 마련해가며 ‘오페라의 유령’과 ‘캣츠’ 글로벌 투어를 뚝심 있게 무대에 올린 유일한 기획자이기도 하다.
설 대표는 ‘뮤지컬을 만들지는 않고 수입만 한다’는 눈총도 받는데 실상은 다르다.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그림자를 판 사나이’, ‘검은 사제들’을 만든 알앤디웍스를 개인 차원에서 후방 지원 중이다. 설 대표는 “맨 처음에 ‘사랑은 비를 타고’를 만든 우리는 태생이 창작사”라고 말했다. “좋은 크리에이터, 창작 콘텐츠가 시장에서 제 가치를 찾고,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역할을 바로 알앤디웍스가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선 손해난다고 싫어할 수 있지만 창작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계속 지원하고 있어요.”
설 대표의 최근 가장 큰 도전은 2019년 부산에서 개관한 드림씨어터다. 1727석 규모로, 상설좌석 기준 한국 최대의 뮤지컬 전용 극장이다. 과연 그만한 객석을 채울 수 있겠느냐는 개관 당시 공연계 우려가 무색하게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공연은 서울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산, 대구 시장을 키워왔는데 지역이 성장해야 전체 시장도 커집니다. 처음엔 걱정도 많았지만, 개관작 ‘라이온킹’이 6주간 연일 매진되면서 확신을 가졌죠. 지방에도 수준 높은 공연이 필요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서울 공연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부산을 아시아 뮤지컬 투어의 허브로 만들고 싶어요.”
설도권 클립서비스 대표는…
●1963년 경북 포항 출생 ●1988년 홍익대 경영학과 졸업(1988) ●1989∼1993년 음반 제작 ●1995년 삼성영상사업단 T&S컴퍼니 기획실장 ●2000∼현재 클립서비스 대표 ●2010년 좌석연동 티켓시스템 개발 ●2017년 70억원 규모 국내 첫 공연인프라펀드 결성 ●1995년 ‘사랑은 비를 타고’, 2001년 ‘오페라의 유령’ 등 뮤지컬 총 66편·시즌 기획·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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