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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도시 풍경 속 반짝이는 기억의 편린

입력 : 2025-05-06 05:00:00 수정 : 2025-05-05 21: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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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일까지 ‘실버’展 여는 작가 구지윤

건물·아스팔트 둘러싼 도시에
유기적 존재의 모습 투영시켜
색이 쌓이고 겹쳐지는 과정서
소멸 아닌 ‘시간의 축적’ 표현
은빛 통해 ‘존재의 공존’ 환기

오래된 아파트 구석에 생겨난 거미줄이나 균열조차도 그의 캔버스에선 예술이 된다.  

 

작가 구지윤은 작업실로 가는 길에 다세대 주택에 둘러싸인 백제시대 고분을 보면서 이 도시가 얼마나 많은 층위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새삼 생각한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수천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 아래에는 또 다른 서울이 존재한다. 신축 공사 중 우연히 드러나는 과거의 흔적들을 마주할 때, 지나간 시간과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얇고 취약한 층을 이루며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지 실감하는 것이다. 

‘사라지는 사물’

누군가 서울의 색을 물어보면, 그는 ‘회색’과 ‘은색’ 사이에서 고민한다. 회색은 모든 것을 흡수하고 평평하게 만드는 특유의 불투명성으로 사라진 것이 있던 자리 위에 새로운 것을 덧씌우는 색이다. 작업실 창을 통해 보는 롯데타워, 대규모 신축 아파트 단지…. 오래되고 익숙한 것의 흔적을 지우는 공허한 색이다. 반면 은색은 반사해낼 줄 안다. 과거의 빛을 받아 되돌려보내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시간의 흔적을 순간적으로 되살려 놓는다. 그것은 한강의 부서지는 물비늘에서, 공사장에서 발견된 토기의 파편에서 반짝인다. 은색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지워진 것과 남겨진 것 사이를 떠도는 빛이다. 은색은 축적된 기억의 반사이자 순간적으로 나타나 존재하는 과거이며 사라지지 않는 시간의 잔영이다.

‘빈티지’

구지윤은 그림을 그리며 붓 자국의 중첩이 도시의 시간성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색이 쌓이고, 지워지고, 다시 겹쳐지는 과정에서 그 표면은 더 이상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이 스며든 장(場)으로 변한다. 작업 과정에서 처음에는 무질서하게 보였던 붓 자국들이 이제껏 쌓인 이미지와 함께 서서히 의미 있는 구조를 형성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결코 우연한 배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구지윤의 개인전이 6월7일까지 서울 종로구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다. ‘실버’라는 열쇠말 아래 도시의 시간성을 회화의 언어로 풀어낸 신작 21점을 선보인다. 구지윤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서울의 풍경으로부터 추출한 인상과 정서를 추상회화의 언어로 번안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는 끝없이 솟아나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건물과 도로, 갖가지 인공 구조물이 밀집한 도시의 속성에 생물학적 유기체의 모습을 투영한다.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유기적 존재들처럼 언젠가 기억 속에만 남게 될 도시의 운명을 연민하는 것이다. 

‘균열을 따라 읽기’

전시명 ‘실버’는 주제로서의 도시와 매체로서의 회화 양측에 내재한 ‘빛’과 ‘시간’을 동시에 상징한다. ‘실버’는 대상의 표면에 맞닿은 빛을 반사하여 보는 자에게 되돌려주는 매개체이자 투영체다. 이는 은빛 자체를 지시하는 단어라기보다, 모든 색에 ‘빛’과 ‘시간’의 속성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상징이다. 회화의 화면 위에 중첩된 다양한 색은 제각기 다른 파장을 지닌 빛의 편린이다. 서로 다른 물리적 성질에 따라 반사된 빛은 우리 시각 체계에 의해 때로는 찬란한 유채색으로, 때로는 고요한 무채색으로 포착된다. 대상을 경유하여 색으로 되돌아온 빛은 보는 자의 감정과 정서에 관여하는 심미적 요소로 거듭난다.

‘빛바랜 실버’

시간은 구지윤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또 하나의 중심 개념이다. 그는 물감의 층위를 쌓아 올리는 붓의 움직임에 도시의 시간을 입힌다. 색이 쌓이고 묻히기를 거듭하는 회화의 과정 속에서, 화면은 마침내 ‘시간이 스며든 장’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실버’라는 전시명과 ‘빈티지’, ‘파티나’, ‘빛바랜 실버’, ‘화석’ 등의 작품명은 저마다 ‘시간의 축적’과 ‘나이 듦’의 감각을 떠올린다.

‘화석’

수많은 것이 바삐 지어지고 금세 사라지는 오늘날 도시의 생태 가운데, 어떠한 대상과 존재들은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머물며 나이 들어 간다. 기억과 역사를 품은 사물과 장소, 사람들은 그 ‘시간’을 반사하여 세상에 되돌려줌으로써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로 거듭나기도 한다. 오래되고 낡은 것을 연상시키는 낱말들은 구지윤의 화면 위에서 ‘소멸’이 아닌 ‘축적’을 이야기한다. 출품작들은 회화의 언어로 묘사된 대상들이 각자 어떠한 시간을 반사하고 투영하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인지되는지에 관한 탐구의 결과물이다.

‘거미줄’

구지윤은 지금, 여기를 그리려 한다. 그림을 남기는 일은 단순한 풍경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여기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흔적을 붙잡는 일이다. 마치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화석이 되어 현재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현재의 것을 기록하고 견고하게 물질화해, 내일 혹은 더 먼 미래로 보내고 그것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벽 틈새에 숨겨진 메모’

그는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 사라졌다고 믿던 것들이 빛에 반사된 먼지처럼 여전히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고 여긴다. ‘회색’으로 둘러싸인 여기에서 ‘은색’을 찾는다. 반사되는 빛 속에서 우리는 한때 존재했던 가치들을 마주하게 된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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