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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좌절한 자를 위한 부정선거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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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5-01 00:04:19 수정 : 2025-05-01 0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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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조작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 특히 지지하거나 혐오하는 정당이 뚜렷한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그러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애타는 마음으로 밤새 박빙의 개표 실황을 봤는데 결국 ‘우리 편’이 졌어. 내 주위에 그놈을 지지하는 자를 보거나 들은 적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아쉬움이 의심이 되고 안타까움이 의심을 굳힌다. “그래, 놈들이 선거를 조작한 거야.”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물론 그러한 의혹의 내구성이 그리 강하지는 않다. 선거 패배에 따른 좌절, 그에서 비롯한 의심은 시간이 지나면 완화된다. 격정적인 개표의 밤을 지나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일상의 과제를 허겁지겁 해치우다 보면 좌절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휘발되고 굳어진 의심은 아련해지기 마련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때도 있다. 2024년 내란의 밤 이후 4개월 동안 한국이 그랬다.

선거에 패배한 정당과 그에 좌절한 지지자들은 잠깐이나마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취약해진다. 선거에 패배한 자기 책임의 이유와 사정에 대해 숙고하기보다 패배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에게 전가하고자 한다. 좌절한 지지자는 자기가 밀던 후보의 패배가 믿고 싶지 않다.

“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음모론이다(conspiracy theories are for losers).”

미국의 정치학자 조지프 우친스키와 조지프 패런트의 주장이다. 실제로 2012년 민주당의 오바마 대통령이 승리했을 때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던 시민의 36%는 부정선거를 의심했다. 공화당 지지자만 그랬을까. 2004년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의 승리를 인정할 수 없었던 민주당 지지자의 37%도 그랬다.

한국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더 심각하다고 해야 하나? 2025년 2월 ‘시사인’과 한국리서치가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층 66%가 2024년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응답했다. 놀랄 만한 수치다. 왜 이렇게 높지?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면 부정선거 의혹의 크기는 줄어들고 그 강도가 낮아진다. 의혹은 그저 선거 패배로 좌절한 자들을 위한 ‘일시적인 도피처’가 될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특히 대통령이나 여당이 부정선거의 의혹을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으로 제기할 때 의혹은 잠시 머물 도피처가 아니라 ‘영원한 안식처’가 될 공산이 커진다. 온갖 권력 수단을 그러쥔 대통령과 여당이 제기하는 의혹은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혹 근거가 부족하거나 증거가 미비할 수 있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다. 힘을 이용해서 사실이라 우기거나 증거를 ‘창조’하면 된다. 비상계엄 이후 4개월 동안 한국이 그런 상태였다.

윤석열이 파면되고 조기 대선을 앞둔 지금, 부정선거 음모론은 루저를 위한 음모론의 가치를 많이 상실하게 되었다. 광장에서 탄핵을 반대하면서 패배의 쓰라림을 격렬하게 배출할 수 있었던 좌절한 자들은 잠시 미뤄 두었던 일상의 과제와 법적인 책임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정선거 음모론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으려는 사람이나 세력이 있다. 가령 황교안 전 총리는 나경원 후보가 대선 후보 1차 예비경선에서 탈락하자 의혹을 제기했다. “나경원 후보는 이번 경선에서 정상적으로는 절대 탈락할 수 없는 사람이다.” 21세기 한국의 부정선거 음모론자의 높은 직위(전 대통령과 전 대통령 직무대행)에 걸맞은 신박한 논리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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