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선 패자였지만 존경받는 역사의 승자로
전봉준은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한 뒤 재기를 모색하다가 옛 부하 김경천의 배신으로 동족의 손을 거쳐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그럼에도 그는 고을 벼슬아치들이 일본군을 접대하는 모습을 보자, 그들을 ‘너희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꾸짖었다.
곧이어 일본영사관에 수감되었고 일본군 장교에게 심문을 받았다. 일본 측은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대원군이 이른바 동학란의 배후조종자임을 밝힘으로써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원군을 정계에서 축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봉준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면서도 대원군과의 연루를 완강하게 부인하였다. 오히려 1894년 9월 제2차 기포의 이유로 일본군의 불법적인 경복궁 점령을 들었다. 나아가 그는 농민군의 궁극적인 목표가 토지제도와 산림제의 개혁에 있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특정 소수 계층이 농지를 독점하며 대다수 농민으로부터 고율 소작료를 수취하는 현실을 바꾸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공유지나 다름없어 땔감이나 약초, 나물 등을 제공하여 농민들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었던 산림이 어느새 일부 권세 양반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이를 찾아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 측은 전봉준의 정치적 영향력과 민중들의 새 세상에 대한 열망을 꺾기 위해 회유와 포섭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공작은 동학란이 전개되는 와중에 이미 시작되었다. 어느 일본 낭인은 일본 군부와 최초의 우익단체인 현양사(玄洋社)의 지시를 받아 전라도 순창을 찾았다. 그들은 전봉준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민씨 척족 축출과 청군 공격에 공동 협력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그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후 이들 낭인은 전봉준이 일본영사관에 수감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움직였다. 어느 일본 낭인은 전봉준을 구명하기 위해 본국의 군부에 호소했고 어느 일본 낭인은 영사관의 묵인 아래 전봉준을 직접 만났다. 그들은 동학사상을 존중하고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귀천이 없고 평등이 보장된 개혁을 이룩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또 전봉준이 일본 공사에 청원하여 목숨을 연명할 것을 제안하는가 하면 심지어 전봉준에게 탈출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여기까지 이르러 비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 지 오래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전봉준은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 만 40세의 나이로 그의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에 비록 소수지만 일부 농민군 지도자는 일본 측의 온갖 협박과 회유에 넘어갔다. 훗날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섰던 이용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일진회를 해산시킴으로써 그의 권력을 향한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 대다수 한국인의 그에 대한 원망이 심했고 이용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봉준은 민중을 사랑하고 정의와 나라를 위해 애쓴 ‘선생’으로, ‘장군’으로 되살아났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전봉준의 죽음과 농민군의 좌절을 안타까워하며 불렸던 동요 ‘파랑새’가 끊어지지 않고 전승되고 있음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당대 현실에서는 패자였지만 오늘날에는 후손들이 존경하는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연인을 만나러 가거나 책을 구매하러 종로 거리를 거닐 때, 옛 전옥서 터에 자리 잡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둘러보며 건립문을 음미하면 금상첨화겠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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