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면 ‘사업 다각화’, 실패하면 ‘문어발식 확장’이란 말이 있다. 기업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을 시도할 때 그 과정이 어떻든 최종 평가는 실적으로 좌우된다는 뜻이다. 5일 엡손 본사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 나가노현 스와시에 위치한 엡손 본사에는 창업부터 사업 확장까지의 역사를 소개하는 기념관과 그동안 엡손이 개발한 주요 제품을 소개하는 모노즈쿠리(物作り) 박물관이 있다. 모노즈쿠리는 일본어로 물건을 뜻하는 ‘모노’와 만들기란 의미의 ‘즈쿠리’가 합쳐져 ‘장인정신’을 의미한다. 일본 제조업계의 독특한 기업문화를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엡손 발명품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TV가 탑재된 손목시계 ‘TV 워치’다. 요즘이야 스마트워치로 TV를 보는 게 대수로운 일이겠느냐만, TV 워치는 무려 1982년에 출시됐다. 1980년대 당시 브라운관 TV의 두께가 30㎝를 넘었는데 이를 손목에 올릴 정도로 소형화한 점은 곱씹을수록 놀랍다.
박물관엔 32년 전 개발된 엡손의 초소형 자율 이동 로봇 ‘무슈’(Monsieur)도 있었다. 부피가 1㎤에 불과한데 98개 부품으로 이뤄져 빛의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로봇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고, 1998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영구 소장품으로 선정됐다.
엡손의 이런 기술력은 첫 사업이었던 세이코의 시계 부품 공장을 운영하며 쌓은 노하우에서 비롯했다. 현재 엡손의 큰 사업 줄기 세 가지인 △프린터 △프로젝터 △산업용 로봇 등 메뉴팩처링 모두 시계 사업을 더 잘하기 위해, 또는 시계 연구개발 중 쌓은 기술력을 응용해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프린터는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세이코 시계가 공식 타임키퍼로 선정되면서 그 기록을 적어낼 기기가 필요해 개발을 시작했다. 프로젝터는 디지털 시계의 액정표시장치(LCD) 기술을 연구하면서, 산업용 로봇은 시계 제작 공정 자동화에 쓸 로봇이 필요해지면서 제작에 돌입했다.
엡손은 자신이 어떤 기술 강점이 있는지, 어느 분야와 최대 시너지를 내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사업 확장에 나섰다. 그 결과 세계 잉크젯 프린터 시장 2위, 프로젝터와 스카라(수평 다관절) 로봇 시장 각각 1위를 기록하며 연간 10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엡손은 자사의 모노즈쿠리를 ‘성(省·고효율), 소(小·초소형), 정(精·초정밀)’으로 정의한다. 대기업의 필수 생존 전략이 된 사업 다각화를 문어발식 확장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엡손의 성·소·정 과정을 돌아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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