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前 통화수장이 본 침체 원인 분석
아베노믹스의 노골적 정책 개입 등
정치적 압박에 따른 고충도 털어놔
“정부·기업 글로벌 경쟁력 확보 열쇠
끊임없는 구조개선·기술혁신 선도”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시라카와 마사아키/박기영·민지연 옮김/부키/3만5000원
지난해 일본은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9%를 기록했다. 이는 1.4%를 기록한 한국보다 높은 것으로, 연간 경제성장률에서 2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추월했다. 닛케이 평균 주가지수도 지난 7월 최고점 4만2000을 넘어서 34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일본이 1990년 이후 30년간의 침체에서 빠져나오는 분위기이다.
서서히 회복하는 일본 경제와 달리 최근 한국 경제는 죽을 쑤고 있다. 경제성장률 추락과 부동산 버블, 세계 4위 수준인 GDP 대비 가계부채율, 고령화와 인구 감소의 압력 등등. 일각에서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초입을 연상케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경고의 목소리조차 나온다.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한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 침체로 빠지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잃어버린 30년을 경험한 일본으로부터 교훈 또는 반면교사는 없는 것일까. 40년 넘게 일본은행에서 일하고 특히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은행 총재까지 역임한 저자는 책에서 일본은행을 중심으로 현대 일본 경제의 주요한 흐름과 실패, 배워야 할 교훈들을 정리했다.
특히 자신이 일본은행 총재로 재임하는 동안 발생했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듬해 유럽 부채위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등 ‘퍼펙트 스톰’처럼 몰려오는 사건과 재난에 맞서 일본은행이 펼친 여러 대처와 구체적인 내용,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과 협조체제를 마련하는 국제적 대응 과정도 담담히 그렸다.
저자는 험난한 시기 일본의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그것이 당시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정치권과의 긴장 관계에서 어떤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당시 책임자로서 차분하게 분석했다. 그러면서 일본은행 수장으로서 낮은 인플레이션, 저성장, 저금리에 맞서 싸우기 위해 분투했다고 회고했다.
이 과정에서 잘못된 고정관념과 ‘사회적 공기’로 힘들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즉, 1990년대 초 일본 경제의 버블이 붕괴했을 때 일본은행이 적극적인 금융완화 정책을 취하지 않아서 불황과 침체가 장기화되었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고정관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각국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양적 완화에도 세계 주요 선진국이 경기 침체와 저성장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깨졌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중앙은행이 발권력과 금리 인하 및 인상을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중앙은행에 단기 대응을 맡기면서 경기 침체의 근본적인 대책인 제품 경쟁력 제고, 산업 경쟁력 강화를 게을리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것이 ‘일본의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리더들과 사석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경쟁력 상실의 근본 원인은 엔고보다는 제품 자체의 경쟁력 저하라는 다른 견해를 자주 들었다. 특히 일본 전자 산업의 광범위한 경쟁력 하락은 엔고 때문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인식을 가진 비즈니스 리더들조차 재계 수뇌부나 업계 단체의 수장으로서 공식 발언을 할 때는 엔고 현상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민의 평균적인 목소리를 반영해야 할 언론과 여론조차 엔고에 비판 일색인 것은 일본의 비극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일본의 대표적 산업이었던 전자산업이 몰락한 것은 엔고 때문이 아니라 삼성전자나 LG전자에 훨씬 뒤진 경쟁력 때문이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문제의 근원을 그대로 놔두고 금융 대책만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누구도 이를 반박하거나 거스르기 매우 어렵게 된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통화정책이 잠재 성장률에 중립적이라 하더라도 통화정책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자원 배분에 왜곡을 일으켜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일본은행의 신중한 대응으로 이 같은 ‘시대의 공기’를 넘어서려고 했지만 넘어서기엔 역부족했다고 고백했다. 결정적인 것은 정치적 압력, 특히 ‘아베노믹스’의 등장이었다. 통화정책에 대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던 아베 신조 총리와 자민당이 2012년 12월 총선에서 민주당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두자 노골적으로 개입해 압력을 가했다고 폭로했다.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으로 판명 난 이틀 뒤인 2012년 12월19일 나는 자민당 당사를 방문해 아베 총재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아베는 2% 물가 목표라는 정책 협정을 체결하고 싶으니 일본은행이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자민당 정치인들 역시 일본은행의 독립성을 와해하는 방향으로 일본은행법을 개정하겠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거듭하며 2% 인플레이션 목표를 채택하고 통화를 적극적으로 늘리라고 요구했다. 그는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국민이 선출한 권력의 정책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시대의 공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남은 총재직을 사임했다.
저자는 1990년부터 지속된 일본의 ‘잃어버린 시간’과 관련해 왜 성장률이 하락했는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10년 정도의 장기 성장 경로를 결정하는 것은 물가나 통화 같은 명목 변수가 아니라 생산성, 혁신, 노동력 성장과 같은 근본적인 실물 변수라고 강조한다. 결국 정부와 기업의 끊임없는 구조 개선과 기술혁신만이 경제의 활력과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상당수 선진국 경제가 제로 금리에 갇혀 있다며, 일본 경제 경험의 교훈으로서 “제로 금리의 덫에 빠지는 일본화를 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렇다면 최근 금리 인상을 시도 중이지만 여전히 저금리 장기화 상태인 일본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중앙은행은 지금 이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일본은행은 저금리가 장기간 지속되는 ‘저금리 장기화’에 갇힌 최초의 중앙은행이다. 나는 현재 상황이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의 어느 시점이 되면 저금리 기조는 필연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은 현재의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일본이 지나온 길과 한국이 앞으로 돌파해야 할 사회적 과제를 대차대조표처럼 대조해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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