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명의 무용수가 마치 한몸처럼
애절한 선율에 맞춰 칼군무 ‘탄성’
150명의 등장인물·400여벌 의상…
블록버스터 무대에 3시간 ‘순삭’
라이징스타 이유림·전민철 눈도장
숨을 멎게 할 만큼 처연하면서도 고혹적이다. 은은한 달빛 아래 새하얀 튀튀를 입은 무용수 32명이 줄지어 아라베스크(한쪽 다리를 뒤로 곧게 뻗어 높이 들어 올리는 등 발레의 우아함과 균형감을 대표하는 동작)를 반복하며 언덕을 가로질러 내려오는데 그토록 아름답고 슬플 수가 없다.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 40주년을 맞아 지난 27∼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인 대작 발레 ‘라 바야데르’의 3막 중 ‘망령들의 군무’ 장면이다. 독살된 연인 ‘니키야’를 그리워하며 꿈속에서 ‘망령들의 왕국(The Kingdom of the Shades)’을 찾은 전사 ‘솔로르’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장면은 ‘라 바야데르’의 백미다. 발레 ‘백조의 호수’ 중 ‘밤의 호숫가’와 ‘지젤’ 중 ‘윌리들의 숲’과 함께 3대 ‘발레 블랑(Ballet Blanc, 백색 발레)’으로 꼽힌다. 애절한 선율 속에 32명 무용수가 마치 한몸처럼 고난도 춤을 유려한 몸짓으로 그려내는, ‘라 바야데르’의 최고 명장면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이 6년 만에 무대에 올린 ‘라 바야데르’는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었다. 이국적인 배경과 극적인 이야기, 주역부터 단역까지 15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 400여벌의 화려한 의상과 웅장한 무대, 관객 탄성을 자아내고 심장을 건드리는 다채로운 춤과 음악 등이 잘 어우러져 1∼3막 모두 즐길 거리가 풍성했다. 발레 애호가는 물론 발레에 친숙하지 않은 관객도 금방 몰입해 발레의 진수를 맛봤다. 3시간에 육박하는 공연 시간(두 차례 휴식시간 30분 포함)이 지루하지 않게 휙 지나갔다.
프랑스어로 인도의 무희를 뜻하는 ‘라 바야데르’는 프랑스 출신의 전설적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1818∼1910)가 러시아 황실 발레단(현 마린스키발레단)을 위해 1877년 만들었다. 인도 황금제국의 힌두 사원을 배경으로 무희 니키야와 용맹한 전사 솔로르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다. 막강한 권력자인 공주 ‘감자티’가 니키야의 연인 솔로르를 가로채 결혼하고, 최고 승려 ‘브라민’은 니키야에게 욕망을 품으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오스트리아 태생 작곡가 루드비히 밍쿠스(1827∼1907)의 음악도 이야기 흐름을 잘 받쳐준다.
유니버설발레단은 5대 예술감독인 올레그 비노그라도프(87)가 프티파 안무를 기반으로 연출한 ‘라 바야데르’를 1999년 초연했다. 앞서 비노그라도프는 1977년부터 마린스키(옛 키로프)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20여년간 황금기를 이끌었다. 9년 만에 내한한 그는 “‘라 바야데르’만 보면 원작의 정통성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킨 유니버설발레단이 그러지 못한 마린스키발레단보다 훨씬 낫다”며 극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노그라도프는 개·폐막 공연을 직접 관람한 뒤 무대에 올라 유니버설발레단 단원들과 한국 관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흘간 5차례 관객과 만난 ‘라 바야데르’ 무대는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음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29일 마지막 공연에서 각각 니키야와 솔로르로 열연한 이유림(27)과 전민철(20)이 그 주인공이다. 헝가리 국립발레단 솔리스트로 7년간 활동한 이유림은 지난해 10월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로 입단 후 잇따라 주역을 꿰찼다. 이번 ‘라 바야데르’ 데뷔 무대에서도 개막(감자티 역)·폐막(니키야 역) 공연 주연으로 나서 빼어난 춤 실력과 연기력을 뽐냈다. 상대역이었던 수석무용수 강미선(니키아 역)과 홍향기(감자티 역)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기량이었다. 둘의 뒤를 이어 유니버설발레단의 간판 발레리나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
내년 상반기 마린스키발레단 입단을 앞두고 첫 전막 발레에 도전한 전민철은 긴장했는지 잔 실수가 몇 차례 있었고, 감정 연기도 서툰 면이 보였다. 하지만 균형 잡힌 몸매와 날렵하고 높은 도약, 힘찬 몸짓 등 독무를 출 때 뿜어나오는 에너지가 대단했다. 열심히 기량을 닦고 인생·공연 경험이 쌓일 경우 세계적 무용수가 될 만하다. 공연 종료 후 무대 인사(커튼콜) 때 관객들이 이유림과 전민철에게 보낸 엄청난 박수 소리와 환호도 새 발레 스타들을 향한 기대감의 표시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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