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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시집 『봄비를 맞다』 황동규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로”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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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07 16:11:02 수정 : 2024-06-07 19: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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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연결되고 뻗은 골목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어떤 골목에는 누추한 뒷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골목에는 어떤 환한 마음이 엿보이기 한다. 이젠 그런 골목조차 많이 줄어들었다. 아파트와 빌라가 가득 들어선 탓이다. 어느 날 세상을 뜰 때를 생각하며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서달산 아래 사당3동 골목을 둘러본다.

 

“세상 뜰 때/ 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 하고/ (말 대신 손 한번 꽉 잡아주고)/ 가구들과는 눈으로 작별, 외톨이가 되어/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리.”(「그날 저녁」 부문)

 

콘크리트 바닥에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파는 할머니를 보고 작은 밤 한 봉지를 사고, 벤치와 나무를 지나서 약수터를 지나가다가 하늘에 돋는 샛별을 보기도 한다. 어떤 마음을 담은 맹세가 생각나기도 한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느린 걸음을 무심히 느끼면서도 내일이면 또 별이 뜨리라는 걸 알고 있다.

 

“참맹세든 헛맹세든/ 지난 맹세는 다 그립다./ 내일 저녁에도 이 별은 뜨리라./ 걸으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길이 이제 그만 바닥을 지울 때까지.”(「그날 저녁」 부문)

시인 황동규

시력(詩歷) 66년의 시인 황동규(86)가 노년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여전히 시적 자아와 현실 속 자아가 주고받는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생의 의미와 시의 운명을 묻고 답하는 데 온 힘을 쏟는 모습을 노래한 「그날 저녁」을 비롯해 근년 그가 쓰고 발표한 신작 시 59편과 산문 1편을 묶은 열여덟 번째 시집 『봄비를 맞다』(문학과지성사)를 발표했다. 2020년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를 펴낸 지 4년 만이다.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한 인간의 기록”이라고 ‘세게’ 고백했다. “특유의 감수성과 지성이 함께 숨 쉬는 시의 진경은 물론, ‘거듭남의 미학’으로 스스로의 시적 갱신을 궁구하며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현재를 증거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세다’.

 

노시인이 쓰는 시의 소재는 늙음이 됐지만, 그럼에도 이 노 시인의 시가 여타의 시와 다른 것은 어떤 도약적 순간이 사라진 도인적 노인이 아닌,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속에서 어떤 새로운 깨달음이나 도약적 인식, 즉 이피퍼니(epiphany)에 도달하는 순간을 선연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어느 날엔 새 여권을 신청하는데 지문이 오랜 시간 닳고 닳아 없어진 것을 알게 되고, 찜찜함 속에 겨우 수속을 마친 시인은 돌연 모종의 깨달음에 다다른다. “가만, 나도 모르게 세상 여기저기 찍어놓고 갈 물증을 지워버리고 살게 됐어./ 홀가분하지./ 느낌들을 가볍게 밀며 걷는다.”(「지문」 부문)

 

특히 표제시 「봄비를 맞다」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는 노년의 삶에 닥친 인식의 도약과 그 순간을 놀랍도록 아름답게 포착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봄비 내리는 날, 힘들게 일어난 노인은 전날 오후 산책길에 만난 고사목을 떠올리면서 다시 생의 활력을 찾는다.

“지난가을/ 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거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아 했지./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봄비를 맞다」 부문)

 

산문 「사당3동 별곡」은 삼십여 년 전 서초동에서 이사온 뒤 세월과 함께 보고 느끼고 체험한 서울 사당3동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은퇴 이후 십년 넘게 서달산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산책을 즐겨온 시인은 최근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걸음이 느려졌지만 대신 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사고의 선회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우선 우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우연을 만나게 된다...우연한 만남이 주는 놀라움 섞인 반가움은 기대했던 만남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우연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상사는 즐거움 80~90퍼센트를 잃을 수 있다.”(130쪽)

 

평소처럼 서울 명동의 음악다방에서 고교생 황동규가 친구와 함께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돼 문화적 체험을 하기 어려운 당시 서울에서 음악다방은 그와 젊은이들에게 청각적 즐거움과 해방감을 주는 공간이었다. 방과 후에 자주 음악다방을 찾았고, 어느 순간 작곡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단편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의 아들이기도 했던 그는, 일제 강점기인 초등학교 입학 직전 아버지가 원고지 뒷면에 가갸거겨, 로 시작하는 한글을 정서해 주며 일본 가나보다 한글을 먼저 외우도록 한 덕분에 한글을 빨리 깨쳤다. 자연스럽게 책도 빨리 접했고, 초등학교 때 이미 소년잡지를 읽거나 방정환의 『소파 동화집』, 박태원이 번역한 『삼국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등을 섭렵한 ‘문학소년’이었다.

 

이날 마침 베토벤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와 친구는 베토벤 음악을 따라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친구는 베토벤 음을 정확하게 소리를 냈지만, 그는 정확하게 불지 못했다. 발성 음치였다. 그는 그때 “눈물을 머금고” 작곡가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음악과 가장 비슷한 시를, 문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을 하겠다고 밝혔을 때 어머니는 의대나 법대 진학을 희망하고 강하게 반대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반대하진 않았다. “후회하지 않을 일은 뭐든 해도 좋다, 나같이 고생하지 말고 잘 살아라.” 시인 황동규의 원점이었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즐거운 편지」 전체)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눠주던 교지에 짝사랑하던 연상의 여인을 대상으로 쓴 시 「즐거운 편지」를 발표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전통을 이은 연애시였다. 나중에 대학 2학년 때 「즐거운 편지」를 비롯해 몇 편의 시를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발표했다.

 

1938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소설가 황순원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황동규는 1958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즐거운 편지」, 「10월」, 「동백나무」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시집 『어떤 개인 날』, 『비가』, 『평균율』, 『삼남에 내리는 눈』, 『악어를 조심하라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풍장』,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등을 발표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김종삼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체감 온도가 40도가 넘는 어느 여름 날 오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달산 자락을 걷고 있는 노인을 만날 지 모른다. 현충원 사당문으로 갈까, 상도문으로 갈까. 서너 발자국 앞 더위 아지랑이 속에서 박새 하나가 훌쩍 뛰어올라 날아가는 순간, 노인은 문득 지난날 『벽암록』에서 만난 선사를 만나서 선문답을 하고 있는 지도.

 

“‘마침 잘 왔네. 이 찜통더위에/ 걸터앉을 데마저 없다. 어떡하지?’/ -견딜 견자지./ ‘바로 뛰고 모로 뛰어도 견딜 수 없을 땐?’/ -훌쩍 뛰게./ 내 입에서 나도 몰래 주문이 흘러나온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서달산 문답」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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