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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막론 데이트 폭력 심각
사랑의 끝, 끔찍한 파국만 남아
김소월의 ‘진달래’ 시 구절처럼
서로 말 없이 고이 보내줬으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구절엔 심오한 아이러니가 내포된 거 맞죠?” 제니스가 영어로 번역한 ‘진달래꽃’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제니스는 미국 시인인데 미국에서 열린 번역 워크숍에서 김소월의 시를 번역했다고. 그녀는 한국인 특유의 이별의 정한과 민요적 리듬감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우리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을 보고 느리게 산책하는 내내 스무 살 청년이 백여 년 전에 썼던 시에 관해 토론하다시피 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서의 역겨움이란?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에서 나타나는 찬란한 체념의 경지와 예스러운 어투 등 제니스는 끝없이 질문해 왔다. 평일 봄날 경복궁 경내가 외국인 관광객으로 인산인해여서 놀랐고, 미국에서 온 젊은 시인이 ‘진달래꽃’이라는 한국 전통서정시에 탐닉하는 것도 경이로웠다.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문 문예지 발행인의 청탁으로 나는 시 한 편을 수록한 적 있는데, 그 문예지의 제호도 아젤리아, 즉 ‘진달래꽃’이었다.

 

김이듬 시인

동서양을 막론하고 데이트 폭력이 비일비재한 시절이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긴커녕 이별의 현장엔 총칼이 난무하고 피가 낭자하다. 사랑의 끔찍한 파국, 데이트 폭력의 실체와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의 예상을 초월한다. 예순 넘은 노년층의 데이트 살인 사건까지 뉴스로 접한 오늘은 그 충격이 엄청나다.

 

사랑이라는 미묘하고 아름다운 마음은 변하는 것이다. 이별은 사랑의 숙명이다.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의 순간을 숭고하게 맞이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끝날까지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한 채 죽는 사람이 많다.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 심지어 그 가족까지 살해하는 사건은 왜 발생하는 걸까? 인간에게는 진달래처럼 환한 한 떨기의 이타심, 끝내 시들지 않는 한 잎의 양심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이런 말 할 자격 없다. 내게 결별 통보는 다루기 힘든 괴물 같았다. 한 사람이라는 세계로부터 추방당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무시되고 혐오 받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웠다. 밤늦도록 그의 집 앞을 서성거리다가 불쑥 멱살 잡고 “날 진짜 사랑하긴 했었냐”고 묻고 싶었다. 마음이 온통 불길처럼 타올라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이 되곤 했다. 물론 젊었을 때 일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흔하디흔한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 나는 잿더미처럼 떠가는 구름을 본다. 저 구름이 무한히 흘러가듯 사랑 이후의 감정도 미미한 친밀함과 익숙함, 안전함을 띤 채 다른 형태로 변하며 이동하는 것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별 특징이 없던 내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들썩이는 마음의 주전자 물이 끓어 넘치기 직전에 꺼주었던 사람도 있었다. 내가 바라는 사랑의 형태와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의 형태가 현기증 나게 달라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사랑일까 아닐까 고민하다가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는 쪽을 선택한 적도 있었다. 이런 정황이 드러나는 부끄러운 시 한 편 소개한다. 시시각각 가로수의 버찌가 수없이 떨어지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온통 참혹할 정도로 검붉은 길바닥을 보며 열매를 밟지 않으려 춤추듯 걷는다.

 

자두가 열렸다

자두나무니까

자두와 자두나무 사이에는 가느다란 꼭지가 있다

 

가장 연약하게

처음부터 가는 금을 그어놓고

두 개의 세계는 분리를 기다린다

이것이 최고의 완성이라는 듯이

 

​난 말이지

정신적인 사랑, 이런 말 안 믿어

 

​다행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카페 루이제에서 자두나무가 있는 정원까지 오는 동안

혼자 흐릿하게 떨리는 게 순수한 사랑이라고

나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시시각각 자두가 붉어지고 멀어지고

노을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다

 

​최고의 선은 각자의 세계를 향해 가는 것

그러나 가끔 이상하게

멈춘 채 돌아보게 된다

 

​자두나무는 자두를 열심히 사랑하여 익히고 떨어뜨리고

나는 사랑을 붉히고 보내야 한다

사람이니까

그리고 망설일 줄 아는 능력이 있다

 

​- ‘다소 이상한 사랑’, 베를린, 달렘의 노래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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