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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 같은 미래… 인간 창조성 영역 위협하는 AI 그려봤다”

입력 : 2024-04-23 20:38:07 수정 : 2024-04-23 2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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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 낸 조광희

작가에 의한 자신 이야기 실시간 소설화
2023년 발표 단편에 AI 등장시켜 서사 확장
인간·AI·이야기의 미래 서늘하게 묘파
소설 속 변호사 건우에는 나의 일상 투영
이 작품으로 문학과 인연 더 깊어진 느낌

문장은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려고 노력
쓸 이야기 중요… 사회생활이 큰 자양분

옛날에 알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10여년 만에 법률사무소로 찾아온다면.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이 간혹 연락이 올 때가 없지는 않았다. 그냥 옛날에 알던 여자가 찾아왔다는 얘기만으로 밋밋하니까 알던 여자를 소설가로 상정하면. 변호사이자 소설가인 자신의 정체성을 쪼개서 절반은 여성 소설가로, 절반은 남성 변호사로 쓴다면?.

평소 버스를 타고 집과 법무법인 사무실을 통근하는 변호사이자 소설가 조광희는 그날도 아마 버스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쓸까. 어느 순간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인간과 인공지능, 이야기의 미래를 서늘하게 묘파한 장편소설이 나왔다. 현직 변호사인 조광희 소설가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시스템을 잘 연구해 반영한다면 창조성의 영역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재문 기자

그는 법률사무소에 찾아온 여성 작가에 의해 자신의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소설로 발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한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소설을 지난해 발표했다. 얼마 뒤 문우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다른 발상이 덧붙여졌다.

만약 이 이야기에 인공지능(AI)을 전면적으로 등장시킨다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는 AI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두 번째 장편소설 ‘인간의 법정’을 쓰면서 이미 AI에 대해 어느 정도 학습이 돼 있는 상태였다. 소설가와 AI가 함께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뜻하지 않는 사달이 벌어지는 이야기로?.

“이번 장편소설은 지난해 발표한 단편소설을 양적, 질적으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원래는 인공지능을 소품처럼 등장시키려고 했는데, 상상이 계속 번져가면서 결국 거의 주인공 격이 돼버렸네요. 처음 쓸 때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흘러간 것 같아요.”

현직 변호사인 소설가 조광희가 인간과 AI, 이야기의 미래를 서늘하게 묘파한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문학과지성사)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세 번째 장편소설.

‘변호사 건우’는 어느 날 사무실로 찾아온 ‘소설가 밤의’로부터 해외 출판사와 계약을 맺는 조건과 관련해 조언을 의뢰받는다. 건우는 우연히 밤의의 소설에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담긴 것을 알게 되어 당황하고, 현재의 이야기조차 그녀에 의해 실시간으로 발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급히 밤의를 찾아간다. 급기야 밤의는 작품 ‘먼저 상상하고 나중에 움직인다’에 미래의 일까지 예고하고, 스스로 현실로 뛰어들어서 작품의 예언을 실현시키는데.

하지만 이야기는 소설가 건우의 주문에 의해서 ‘변호사 건우’의 시각으로 창조한 이야기였다. 건우는 같은 이야기이지만 ‘소설가 밤의’의 시각에서 2편을 집필한다. AI 레비와 소설가 건우가 쓴 소설이 액자처럼 차례로 이어진 가운데, 건우는 2편의 뒷이야기를 레비와 함께 쓰기로 한다. 건우와 레비는 곧 성애 장면의 묘사를 둘러싸고 의견 차이를 보이고 비극적인 사달로 치닫는다.

“‘저는 다른 의도가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어떤 의도?’ ‘한 부라도 더 팔아보겠다는 의도 말입니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까, 제대로 말해보자. 작가가 한 부라도 더 팔아야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젊은 날을 바쳐가며 추구한 길에서 이탈하시는 것 같아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건우는 AI가 걱정해주는 존재가 된 자신이 비참하다. AI 주제에 감히 내 인생을 걱정하다니.”

소설은 간결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 흥미로운 반전, 인물과 시각의 뒤바뀜을 통해서 인간과 AI, 이야기의 서늘한 미래를 보여준다. 머지않아 AI가 감정을 가질 수도 있고, 심지어 창의성의 영역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시간문제라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혹시 인생보다 내러티브가 더 근원적인 것일까라고 되묻고 “그렇지는 않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변호사에 영화 제작자의 경험까지 가진 조광희가 소설에서 바라본 인간과 AI, 이야기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 ‘르네상스적 작가’의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조 작가를 지난 19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액자소설 속의 인물 ‘소설가 밤의’와 ‘소설가 건우’도 매력적인데.

“현실에서 소설과 문학의 길을 끝까지 걸은 것은 죽은 소설가 건우이고, 액자소설 속의 소설가 밤의는 현실에선 변호사가 된 미연이다. 그러니까 옛날에 만났던 미연이라는 여자에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고민을 투영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약간 직관적으로 썼다. 변호사 건우의 경우 제가 변호사라서 제 경험이나 아는 일상이 조금 투영이 된 것 같다. (어떤 부분인지) 증인 이현식이 법정에 나왔다가 사라진 장면은 실제로 경험한 장면은 아니지만, 제가 상상해본 적이 있는 풍경이다.”

―현실이 된 AI 문제는 어떻게 보는가.

“인공지능이 세상의 루틴한 것들은 제법 하는 것 같은데, 창조적인 일은 아직 못 넘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끝까지 창조성의 문제를 못 넘어갈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특별히 숭고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을 잘 연구해 반영한다면 창조성의 영역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언제냐의 문제 같다. 이럴 경우 예술가나 작가들의 설 자리가 난감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에선 인간의 창조성 영역을 위협하는 AI를 그려봤다.”

―이번 작품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작가라는 정체성이 아직도 어색하고 부족한데, 이번 작품을 쓰면서 조금 더 문학 속으로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문학에 더 매료되는 느낌을 받았다. 문학과 인연이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1966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조광희는 변호사와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2018년 첫 장편소설 ‘리셋’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인간의 법정’ 등을 발표했다.

―소설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일단은 문장을 좀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려고 하는 편이다. 바로 쓰지 않고 큰 그림이나 구조를 먼저 설계한 뒤 글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에 관한 콘셉트를 정하고, 짧은 줄거리를 담은 한두 페이지의 시놉시스를 만든 뒤, 장절을 구분해 20~30페이지의 트리트먼트를 만든다. 이것을 바탕으로 몇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글을 쓴다. 무엇보다 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아무리 문장력이 훌륭하거나 문학적으로 뛰어나도 쓸 이야기가 마땅치 않을 수도 있다. 변호사나 영화 제작 경험 등 사회생활이 큰 자양분이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변호사 업무도 계속할 생각이다.”

인터뷰 내내 가지런하고 정돈됐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적당한 정도의 흰머리를 가지런하게 다듬은 그는 질문에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들려준 그의 생활 역시 가지런했다. 그러니까 오전 6, 7시쯤 일어나서 개에게 밥을 주고, 주스 같은 것을 딸에게 만들어준 뒤, 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해 일을 한다. 일이 끝나고 약속이 있으면 약속장소에 나가지만, 약속이 없으면 버스로 귀가해 글을 쓰다가 밤 10시쯤 꿈나라로. 주말에는 남산공원을 비롯해 공원을 걷고 남산도서관에서 책도 읽을 것이다. 반나절 정도는 글을 쓰고, 가끔은 영화도 보고.

정돈된 삶에서 움터오는 조광희의 이야기 역시 가지런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 사회를 서서히 육박해 오고 있는 AI를 둘러싼 묵직한 질문 역시 가지런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등에선 식은땀이 솟고, 두 손은 어느새 부들부들. 세상과 삶은, 이야기 역시 어차피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건우는 당연한 진리를 다시 절감한다. 세상과 삶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지, 그 가치 때문에 정당화되는 게 아니라는 걸. 우주의 희망이라서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건 인류의 한낱 망상이다. 세상과 삶은 의미와 무관하다. 건우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문학을 모욕하며, 인간의 명예를 훼손하는 레비에게 차라리 복종해버릴까 하는 충동마저 느낀다. 그래, 레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알아서 머리를 조아리고 굴레를 쓰면 레비가 일용할 양식을 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조차 건우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은 어차피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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