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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위패와 행방불명된 4000명… 아직 오지 않은 '제주의 봄'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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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04 21:00:00 수정 : 2024-04-04 19: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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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제주 4·3
“둘째 아들도 며느리도, 큰아들도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걱정 말라면서 떠나갔는데 아무도 안 돌아와.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 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백 년이고 아들을 다시 보기 전에 죽을 수가 없어.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제주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평화공원 내부 위패봉안실. 이름없이 ‘김계식의 1자’로 쓰여 있는 위패(왼쪽)과 4·3 희생자 무명신위

1948년 3월 경찰의 고문 치사로 사망한 고(故) 양은하씨의 어머니가 생전 남긴 증언이다. 양씨의 죽음은 4·3사건의 발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제주 4·3특별법은 제주4·3의 시작을 1947년 3월1일로 규정한다. 이날 열린 3·1절 기념대회 중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차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이 조치 없이 그대로 가버리자 일부 군중이 항의하며 경찰을 쫓았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며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같은 해 3월10일 제주도 전역에서 총파업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경찰의 강경 진압이 시작됐다. 양씨도 이때 희생당했다. 경찰은 이른바 ‘좌익 색채’를 토벌한다는 구실로 제주도민들을 무차별 탄압했고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도 무장대가 등장하며 동족상잔의 참극이 발생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 4·3으로 인명피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약 10분의 1인 2만5000~3만명에 이른다. 이는 1948년 초부터 1949년 말까지 감소한 제주도 인구수를 바탕으로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해 산출한 수치다. 희생자의 33%가 노약자와 어린이, 여성인 것으로도 조사됐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음을 알 수 있다.

 

제주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평화공원에는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는 위패봉안실이 있다. 위패봉안실에는 1만4000여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하지만 위패만큼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은 아니다. ‘김계생의 1·2·3·4자’, ‘오달용의 자’ 등 당시 미처 출생신고가 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어린 나이에 이름도 없이 희생당한 것으로 파악되는 이들도 있다. 위패봉안실 한 편에는 ‘무명신위’ 위패도 봉안돼 있다. 아직까지 4·3 희생자로 결정되지 못한 모든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함이다.

제주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평화공원 내부의 제주 4·3행방불명인 표석. 안경준 기자

위패봉안실 건너에는 제주4·3행방불명인 표석이 있다. 제주4·3 도중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이 4028명에 달한다. 행방불명인 대부분은 제주4.3 중 체포돼 제주와 육지 곳곳의 형무소로 이송된 후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다. 시민단체 제주 다크투어는 당시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거하면 좌파 세력으로 몰리는 분위기가 있어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육지로 이송된 희생자 중에서는 6·25 전쟁이 발발하며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이들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섯알오름 학살터는 약 190명이 사살된 집단 학살터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 구금했는데, 제주 계엄당국에서도 820명의 주민들을 예비검속(좌익 활동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미리 구속하는 조치)했다. 당국은 이들 중 제주4·3 연루 혐의자 등을 법적 절차 없이 총살하거나 물웅덩이에 암매장했다. 이 사건은 2015년 대법원에 의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기도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11월 해당 사건을 ‘국가에 의한 불법 집단 학살’로 규명했고, 이에 유족들은 2010년 11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15년 7월 대법원은 “희생자 유족에게 국가가 총 94억4000여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모습. 안경준 기자

제주 4·3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0년 1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4·3특별법)’이 제정·공포됐고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일부 제주 4·3 유족과 단체는 책임자에 대한 규명과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3일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김창범 4·3유족회장은 “제주 4·3 가족관계 특례조항 마련과 4·3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트라우마 센터의 설치, 조속한 직권 재심 등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4·3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노정에서 미진한 부분에 대해 정부는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제주=안경준 기자 eyewher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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