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 사용자가 베푸는 호의”
각 정당,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 공감
직장인 A씨는 지난달 독감에 걸려 연차를 썼다. 아파서 연차를 쓰는 것도 서러웠는데 상사로부터 진단서를 제출하라는 황당한 말까지 들었다. 연차를 쓰고 진짜 병원에 가는지, 집에서 쉬는 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 취업규칙도 3일 이상 병가를 사용할 때만 진단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사는 진단서를 내기 전까지 휴가 결재는 물론이고 급여도 주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A씨의 경험담은 유별난 ‘악덕 상사’가 벌인 드문 일이 아니다.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들은 쓰고 싶을 때 법이 정하고 있는 만큼 휴가를 쓰기 어렵다고 말했다. ‘1년간 15일의 유급휴가’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부여해야 한다는 근로기준법 제60조가 5인 미만 사업장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는 5인 미만 사업장 직장인 10명 가운데 7명이 지난해 연차휴가를 일주일도 못 썼다고 24일 밝혔다. 이 단체는 지난달 2일부터 13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2023년 연차휴가 사용 빈도 및 자유로운 연차휴가 사용 가능성’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해당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5인 미만 사업장 직장인 67.9%가 지난해 연차휴가를 6일 미만으로 사용했다고 응답했다. 그밖에 응답으로는 6일 이상 9일 미만이 6.8%, 9일 이상 9일 미만 6.8%, 12일 이상 15일 미만 6.3%, 15일 이상 12.1%였다.
직원이 300인 이상인 사업장에선 상황이 정반대였다. 5인 미만 사업장 직장인의 경우 연차휴가를 6일 미만으로 사용했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지만, 300인 이상 사업장에선 이 응답이 가장 적었다. 응답을 살펴보면 6일 미만 16.1%, 6일 이상 9일 미만 18.6%, 9일 이상 12일 미만 22.4%, 12일 이상 15일 미만 23%, 15일 이상 19.9%였다.
두 사업장의 격차는 1년 사이 더 벌어졌다. 2022년 한 해 동안 연차휴가를 6일 미만으로 사용했다는 응답은 5인 미만 사업장 62.1%, 300인 이상 사업장 32.3%로 차이가 29.8%였는데, 2023년 그 격차는 51.8%로 크게 늘었다.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할수록 연차휴가를 더 자유롭게 쓰기 어려웠다. 연차휴가를 6일 미만으로 사용했다는 응답은 5인 미만 사업장 외에도 비정규직(64%), 임금 150만원 미만(72%), 비사무직(58%), 일반사원(63.3%), 비조합원(41.7%)의 경우에서도 높게 나타났다.

심지어는 연차를 쓰고 싶지 않을 때 써야 하는 일도 있었다. 사업장에 일이 없어 휴업하는데 평균 임금의 70% 이상인 휴업 수당을 주지 않기 위해 연차를 쓰도록 종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터에서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응답은 5인 미만 58.4%, 비정규직 54.4%, 비사무직 51%, 일반사원 50.4%에 달했다.
연차휴가 일수와 사용 시기를 법이 정해놨지만, 정작 근로기준법이 가장 필요한 곳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고용노동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기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313만8284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17%에 달한다. 직장갑질119는 이들이 근로기준법에 적용받지 않아 ‘사용자의 호의’가 없는 한 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장종수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5인 미만 사업장은 연차가 발생하지 않고 공휴일에 일하는 경우도 포함한다면 처참한 상황”이라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이 법이 과연 근로자의 기본적 생황을 보장하겠다는 ‘근로기준’법이 맞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22대 국회가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12일 한국노총이 주최한 22대 총선 정당별 노동 사회정책 비교 평가 토론회에서 각 정당 노동정책 담당자들은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 적용을 확대해야 한다는 방향성에 동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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